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현대건설 : GS칼텍스

설리숲 2021. 12. 22. 22:16

 

여자배구경기를 직접 돈을 내고 들어가서 보는 날이 오다니!

프로야구도 아닌, 남자배구도 아닌 여자배구를...

한데 이제 모든 스포츠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 여자배구다. TV중계도 안보던 내가 돈을 내고 들어가서 볼 정도면.

 

수원 현대건설과 GS칼텍스의 경기.

양강의 두 팀이라 관심도도 높았지만 관중석을 보니 과연 여자배구의 인기를 실감하겠다.

 

 

 

 

 

 

 

 

경기는 기대한 그만큼의 재미가 있었고 최강 현대가 승리했다.

그보다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게 있었다.

배구경기장에는 웜업존(warm up zone)이라는 게 있다. 경기에 투입된 6명의 선수 외에 나머지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예전엔 벤치에 앉았는데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웜업존에서 휴식도 취하고 함성을 지르며 동료선수들을 응원하기도 한다. 또한 언제든 경기에 투입될 수 있게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기도 한다.

 

경기 도중 문득문득 웜업존의 풍경을 보는 것도 직관의 재미중 하나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선수가 내 관심을 끌었다. 한시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뛰고 달리고 스트레칭하고 가끔 장내의 음악소리에 맞춰 율동도 하고 시종 다이나믹한 선수였다. 언제든 코트에 들어가도 될만큼 준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멀리서 보기에 단발머리여서 황연주인 줄 알고 팀의 고참이면서 참 성실하고 귀감이 될만한 선수구나 했는데 카메라 줌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황연주가 아니라 9번 선수다. 아직 애송이 티가 역력한 김현지다.

 

공연히 애잔하다. 신인의 꿈은 높지만 현실은 팀의 주축으로 들어가기에 벽도 또한 너무 높다.

프로필을 찾아보니 현대 입단 3년차 세터다.

현대 세터로는 이다영과 김다인이 있어 애송이 김현지에겐 너무 높은 벽이었다. 그러다가 이다영이 흥국생명으로 가고 아직 신인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다인이 주전 세터가 됐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는 김현지가 백업이 되어야 하지만 새로이 기업은행에서 이나연이 옮겨와 역시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섰다.

현재 현대건설은 연봉 9천만원의 어린 김다인이 연봉 1억 5천의 베테랑 이나연을 제치고 주전으로 뛰고 있다.

잘 모르는 문외한의 눈으로는 아니 왜 돈을 많이 주는 선수를 굴려야지 연봉이 적은 선수만 존나게 부려먹지 의문인데 그거야 감독의 소관이겠지. 어쨌든 더 기량이 나은 선수를 신뢰하고 기용하는 거니까. 이나연은 그간 다른 팀에서의 경력도 있는데다가 FA에 의해 연봉은 높지만 기량면에서는 김다인에게 뒤처지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 새내기인 김현지가 주전이 되려면 그들보다 월등한 기량이 아니라면 넘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이날 김현지는 시종 웜업존에서 활발하게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언제 코트에 나설지 불투명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달리는 그 모양이 보기 좋으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다가 기적 같은 순간이 왔다. 그녀가 교체되어 코트로 들어선 것이다. 올 시즌 두 번째라고 한다.

선수로선 정말 황금 같은 기회고 가문에 남길 만한 일이기도 하다. 현대건설이 여유 있게 앞선 상황이라 강 감독이 경험쌓기로 투입했을 것이다. 현대팀 서브상황이었다. 상대팀 서브였다면 세터인 그녀의 영광의 플레이가 있었겠지만, 그 상황이었다면 아마 교체하지도 않았을 테지.

 

이다현의 서브미스로 공격권은 GS칼텍스로 넘어가고 강 감독은 곧바로 김현지를 아웃시켰다. 공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영광의 20초(?)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그녀에겐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이었을까. 코트에 투입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비록 공 한번 터치하지 못하고 나왔을지라도.

신인의 숙명일 것이다.

코트에 나설 일이 거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준비를 하는 그녀, 또는 그녀들의 간절함이 가슴에 와 자리한다. 경기보다도 난 그녀에게서 더 매력을 느꼈다. 어쩌면 이번 시즌 끝날 때까지 코트에 나설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꿈꾸며 준비하는 그녀들을 응원한다.

 

 

 

 이번 시즌 두번째로 코트에...

 얼마나 가슴 떨리는 흥분의 순간이었을까.

 

 

 

 

그러나 이 천금 같은 경험은 잠깐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동료의 서브미스로 공격권이 상대팀으로 넘어가자 지체없이 교체되어 코트를 나왔다. 그 시간이 20초 정도나 될까.

이제 언제 다시 코트에 설지 애송이 신인에겐 기약이 없다.

 

 

 

 

 

코트를 나오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환한 표정.

그녀, 또는 그녀들을 응원한다. 아직 창창하니 그대들의 앞길엔 영광이 있으리니.

 

 

 

그런데,

세상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걱정, 스포츠선수 걱정이라고.

내가 이토록 애잔하게 생각하는 그녀의 연봉이 나보다 많다. 그것도 엄청.

김현지의 연봉이 4,500만 원이라 한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돈을 번다니 짜장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다.

따져보자. 배구리그가 기것해야 5개월인데 5개월 일하고 4,500만원을 벌다니 그것도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나흘에 한번 꼴로. 그것도 두 시간 남짓 일하고.

더구나 김현지 선수 같은 경우는 기껏해야 서너번 정도 경기에 뛸 것이고 그것도 1분 정도만 뛰면 될 것이다.

나처럼 일년 내내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면서 받는 급여를 생각하면 내가 그녀를 애잔하게 생각할 처지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내가 감히 오르지 못할 저 꼭대기 상류층 사람인데. 내 코가 석 자인데.

아, 자본주의의 이 허망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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