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보라섬

설리숲 2020. 12. 28. 18:43

 

이런 섬이 있습니다.

보라섬.

 

글쎄 아름답다고 하긴 뭣하고

신기하고 이색적이긴 합니다.

 

섬으로만 구성된 전남 신안군.

그 중에서 박지도와 반월도입니다. 천 여개에 달하는 흔한 섬이라 그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 두 섬이 최근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죄다 보라색을 칠해 놓아서 일명 보라섬이라 하고,

안좌도와 더불어 세 섬을 연결한 보라색 다리도 퍼플교라는 이름으로 지도에 등록이 돼 있습니다.

오로지 이 보라색에 이끌려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지붕도 보라요,

 

 

길도 보라

 

 

폐가도 보라

 

 

초록이 상징색인 농협도

 

 

뱃바닥도

화장실과 쓰레기통도

어부도

 

마을 촌로도

 

심지어는 밭의 멀칭 비닐도 보라색!

이쯤 되면 실소가 나옵니다.

야 이건 오버다.

 

여름이면 섬의 묵정밭엔 온통 보라색 허브인 라벤더로 가득 차 그야말로 보라섬이라 하겠습니다.

 

 

 

 

한번 왔다 가는 관광객들에겐 제법 좋은 볼거리지만 늘 보라만 대하는 주민들의 눈과 정서는 아주 많이 피로할 것 같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획일화한 모습에 약간은 부정적인 마음도 생깁니다.

파란색으로 올인한 스머프 마을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얻었겠지만 관의 일방적인 행정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 일견 공산주의국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초가지붕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올려 놓던 과거 박정희식 새마을운동도...

 

이건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걸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여기는 나만의 감정이고,

많은 관광객들은 이 아름다운 풍경에 몹시 즐거워합니다.

입장료 수익이 있으니 주민들에게도 다문 혜택이 있을 테고요.

 

 

 

 

 

일명 퍼플교를 건너려면 입장료를 냅니다.

보라색 옷을 입으면 공짜입니다.

너무 보라 보라 타령을 해서 내 빨간 모자를 뺏어서 보라색으로 칠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겨울의 동백도 빨강 그대로 놔두었군요.

 

 

 

 

 

겨울이라 모든 풍광이 무채색의 칙칙한 뷰라 신비감을 자아내는 보라색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선명해 보입니다.

예로부터 보라색은 죽음에 관련된 색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는 소녀가 도라지꽃을 보면서 나는 보라색이 좋다고 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했지요.

내 학창시절 우리집 앞을 지나 학교를 다니던 창백한 여학생이 있었어요.

복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너무도 가늘고 그 피부가 눈부시게 희어서 애잔한 동정이 일곤 했는데

특히 그 입술, 창백한 얼굴에 보랏빛 입술이 유난히 선명해서 난 늘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그녀가 멀지 않아 죽을 것이라는 서글픈 상상.

그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서 더 이상 소녀를 보지 않게 됐는데 어느 때 소녀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박지도 반월도는 왜 하필이면 보라색을 택했는지. 따뜻한 주황색이었으면 좋을 텐데.

 

 

 

 

 

 

보라에 가려 관광객들은 관심없이 지나치지만 사실 이 곳의 바다가 참말 아름답습니다.

햇빛 가득 쏟아져 내리는 풍광은 파라다이스라 할만 합니다.

퍼플교와 박지도 반월도 두 섬의 둘레길을 이어 걷는 여행이 제법 좋습니다. 천천히 여유 있게 걸어도 한나절이면 충분합니다.

 

 

 

 

 

 

 

이곳을 오려면 섬을 네 개나 지나야 하는 먼 여정입니다.

무안에서 다리 건너 압해도

압해도에서 다리 건너 암태도

암태도에서 다리 건너 팔금도

팔금도에서 다리 건너 드디어 안좌도이고

안좌도에서 도보로 퍼플교를 건너 두 섬으로 들어갑니다.

아주 머나먼 여정입니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신안군.

섬이 천 네 개라서 브랜드가 천사입니다.

실제로는 천 네 개가 안되지만 상징적으로 정한 숫자라고 합니다.

작년(2019년)에 개통된 길이 11km나 되는 긴 천사대교는 김대중 정권때 새천년대교라는 이름으로 기획됐었는데 신안의 브랜드화에 따라 ‘천사대교’로 개명했습니다.

걸어 간다면 이 다리 건너는데만 반나절이 소요됩니다.

 

 

 

 

이 일대에 편의점이 서너 군데 있는데 모두 CU편의점입니다.

CU의 상징색이 보라색이니까 어쩌면 이 보라섬의 브랜드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은 그럴듯한 추측을 해 봅니다.

 

이름도 연결되잖아요.

See You...

보라 보라 보라...

 

 

 

 

 

 

 

           킨 : Everybody's Cha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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