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은 우리 문학작품 중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소설이다.
유려한 문체에 디테일한 묘사, 풍부한 어휘의 성찬.
우리말의 보고(寶庫)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보지 못했던 조선의 민중사회를 낱낱이 볼 수 있다.
손위 여자 형제를 일컫는 '언니'가 당시에는 남자에게도 해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간 우리말이 얼마나 많이 변형하고 왜곡되었는지를 일깨운다.
지금 눈으로 보자면 홍명희는 사회주의자다. 그리고 민본주의자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전제정치를 타파하려는 개혁주의자다. 민중 위에 군림하고 앉아 사리사욕을 채우는 가진자들의 불의에 저항한다.
이런 사상의 그가 월북을 한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때는 그곳이 그의 '광장'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실패한 사회주의였지만.
이상과 현저한 괴리를 느낀 그곳에서 고노와 번민으로 여생을 보냈으리라 짐작한다. 스탈린 지배하에서 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쇼스타코비치의 불행한 일생을 기억한다.
괴산에 와서야 홍명희가 이곳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읍내에 그의 생가가 있다. 홍범식고택이라는 명칭으로 군이 관리하고 있다. 홍범식은 그의 부친이다. 금산군수로 재직중 1910년 한일합방이 있었고 홍범식은 비분하여 자결한다. 아들 홍명희는 이곳 사랑채에서 3·1운동을 도모했다. 이 지역에서 있었던 최초의 만세운동이 되었다.
홍범식의 부친인 홍승목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를 역임했다. 우국충절의 아들이 자결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일말의 가책도 없었던 듯 그의 친일은 변함 없었다. 아마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빠 이순재가 했던 못난놈! 하고 말았던 것 같다.
잔인한 올봄.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진리인 시절이 잇을 줄이야. 나무마다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있는데 우리 민중들의 가슴에 봄은 아직이다. 의학문명이 눈부신 이 개명천지에도 역병이 이리 극성이니 과연 인류의 역사는 과연 돌는 것임을 알겠다.
홍범식고택 담장에 버젓이 걸린 현수막.
여전히 적폐 덩어리들이 세균처럼 곳곳에 배어들어 있는 한국사회다.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암세포들. 이 잔인한 봄, 저 암세포들과 코로나가 공히 소멸되어 진정 화사한 꽃을 보았으면 좋겠다.
임재범 : 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