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포천 산정호수 호안길

설리숲 2020. 1. 1. 23:44


동서울터미널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보았다.

예외 없이 인파로 북적대는 중에 모든 소음들을 압도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13번 승강장 출입구 쪽 벽에 남녀 한 쌍이 부둥켜안고 있었다. 둘 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울고 있는 건 여자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등을 토닥토닥 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여자는 사뭇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수많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옛 연인을 오랜 만에 만나 그 한을 토해내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판에 박은 추측을 했다. 두 사람의 풍경은 내가 산정호수행 버스를 타기 위해 자리를 뜨기 까지 계속되었고 그후로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뱃속의 생명을 죽인 이튿날 우리는 산정호수로 갔다. 가을이었다. 호안가의 벚나무 잎이 선홍빛으로 붉은 날이었다. 그냥 걸었다. 고통의 수술을 마친 후라 무척 힘들엇을 테지만 그녀는 애써 밝은 표정을 보였다. 나는 몹시 무거웠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저 호숫가를 거닐다 돌아왔다.










호수의 가장자리 일부는 얼어 있었다. 미세번지 뽀얀 우중충한 겨울날이다. 뜻밖에도 거기서 아까의 두 남녀를 보았다. 그렇게 우렁차게 울어대던 여자는 이제 해사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예 연인의 해후일 거라는 내 추측이 틀림없어 보였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한가득이었지만 차마 그걸 해소할 용기는 없었다. 용기가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사연은 오로지 두 사람의 몫인 것이다. 다만 내가 하나 더 붙인 추측은 그들의 비망록에도 호수가 있지 않을까였다.












 

우리가 죽인 그 가엾은 아이는 어느 호숫가에서 잉태했었다.

우리의 변곡점에는 공교롭게도 호수가 있었다. 우리는 청풍호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집 근처에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 그녀를 만나러 갈 때는 그곳에서 기다리곤 했다. 아이를 죽인 그날에도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난 그 저수지에서 소요하였다. 사랑의 고달픔이나 허무함은 느낄 여력이 없었다. 오로지 시술로 인해 그녀가 겪은 고통만 생각하고 몹시도 아팠다. 미안함과 못난 나 자신에 대한 괴로움과.

석촌호수에서 데이트를 하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하게 다투었다. 그후에 다시 석촌호수에서 데이트를 하던 날 이별의 통보를 받았다.

호수는 그녀와 나에게 애증의 멍에였다.

호수에서 처음 만나 호수에서 이별했다. 호수에서 아이를 가지고 호수에서 죽였다.

 








겨울의 산정호수는 무미건조했다. 물빛은 탁했고, 햇빛은 희미했다. 그저 휴일 한때 나들이 나온 무심한 행락객들의 재재거리는 소리만 수면 위에 너저분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온 남녀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고통을 감내한 그녀가 안됐어서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줄곧 나를 괴롭혀 온 건 아이였다.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우리에게 온 귀한 생명을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 죄과를 어떻게 받을까.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이따금 귀에 들리곤 했다. 행여 내가 즐거울세라 아이는 그때마다 고통의 단발마를 질러댔다.




















산정 호안가에는 죄다 나목이다. 겨울 호수의 냉랭한 찬바람에 몇 닢 안 남은 잎들이 안간힘으로 처절하게 매달려 있다. 내가 버린 그 생명의 처절함처럼.

 









산정호수엘 왜 갔을까. 이제는 세월도 흘러 눈물의 염도도 순해져 그나마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거늘 왜 그곳은 또 갔을까.

 

기껏해야 기억과 추억으로 점철된 것이 사람의 일생이라 한다. 우리는 버릴 줄 모르고 늘 얹고 쌓는다. 그것이 고통인 줄 알면서도 그것만을 반복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돌아보면 내 여행의 대부분은 옛 기억을 되짚어가는 먼 방랑의 길인 것만 같다. 나의 사죄는 내가 행복하지 않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행복하지 말고, 그저 불행하지만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강박증 때문에 기실 불행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죄의 한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겠다.

 

이렇게 내 부끄러운 비망록을 펼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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