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예술의 전당 이야기

설리숲 2019. 1. 24. 00:16


메리어트호텔을 가야 하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거시기 뭐냐 기사님! 난닝군지 뭔지 호텔 거기 알아요?

택시기사는 두말없이 메리어트 호텔 앞에 데려다 주었다.

옳거니 메리어트였구나! 기사님 대단하시네. 어떻게 아셨대.

아 그까이꺼 장사 하루 이틀 하나요. 아까는 전설의 고향에도 갔다 왔는걸요...

 

예술의 전당이다.





섹스, 스포츠, 스크린 이른바 3S정책으로 우민화를 시작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번엔 핏빛으로 물든 자신들의 얼굴을 화장해야 했다. 문화정책이었다.

 

정치인은, 특히 권력자는 건축과 토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이는 이명박의 청계천이나 4대강이 그렇다. 전두환 정권의 3대 건축물은 천안 독립기념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서울 예술의 전당이다.

 

 



 

이미 독립기념관을 밀어붙였던 전두환은 이어 같은 기획팀에게 예술의 전당 건립도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라고 해도 워낙 방대한 공사라 쉽게 진행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부지 구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기획팀이 서울시에게 요구한 부지는 옛 서울고 자리였던 경희궁 터였는데 부지가 협소해 수포가 되었다.

 

두 번째 후보지는 서초동 정보사 부지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정보사의 땅을 빼앗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한강 푸른 물결이 바라보이는 뚝섬을 선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진희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이 반대를 했다. 뚝섬에서 한강변의 강북 저소득층 밀집지역이 바로 보인다는 이유였다. 고급문화의 전당인데, 그리고 외국인들이 드나들 것이니 지저분한 풍경을 보여준다면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찾아낸 곳이 서초동 우면산 자락, 지금의 그 자리다. 예술의 전당이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런 밀리고 밀린 끝에 울며겨자먹은 결과였다.

 

 

 부지가 선정되자 유수의 건축가들에게 공모를 냈다. 당시 한국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과 김중업은 물론 외국 유명 건축가까지 참여한 공모에서 이긴 사람은 건축가로선 약관에다 지명도도 일천한 당시 40세의 김석철이었다.

김중업, 김수근, 김석철의 설계가 최종 후보에 올랐는데 두 거장의 작품이 독창적이고 뛰어났지만 그 독창적인 것이 오히려 기획팀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았고 충실히 반영한 김석철의 작품을 높이 샀다.

김수근과 김중업이란 두 거장에게 모두 배운 사사한 김석철 교수는 두 스승을 이기고 사상 최대의 문화공간 프로젝트를 따내며 일약 건축계의 신성이 되었다.

 


  갓 형상의 오페라하우스


   부채 형상의 음악당

 

 

예술의전당도 건축은 여러 난항을 만나 애초의 김석철의 디자인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  

 

고위층의 누가 뜬금없이 한국 땅에 짓는 거니 한국 전통적 이미지를 넣어야 한다고 하여 예술의 전당은 급히 한국적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의 음악당이 부채, 오페라하우스가 갓 형상이 된 연유다.

 

 



    미술관


   국악당

 

 

예술의전당은 사실상 클래식 음악의 전당이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정체는 지금 같은 클래식 음악 중심 문화공간이 아니었다.

애초에는 시각예술과 자료관을 중심으로 하며 소규모 음악공간들이 딸린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처음 추진됐다. 정부는 당시 방송광고공사에 이 새 문화공간 사업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공사는 부랴부랴 여기저기 아이디어를 찾은 결과 프랑스통인 한 인사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아 파리 퐁피두센터를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음악계에서 오페라하우스 설립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호주 시드니를 거론하며 다른 선진국들처럼 우리가 제대로 된 오페라하우스를 가져야 할 당위성을 주장했다.

가타부타 진통 끝에 결국 오페라하우스 건립에 최종 확정했다.

 

예술의 전당이 개관하고 나자 여러 공간들 중에서도 가장 수요가 많은 공간은 논란의 대상이엇던 오페라하우스였다. 반면 애초 중심으로 구상됐던 소규모 음악공간들은 대중 접점도 적고 사용빈도도 적어 그 존재감이 미미해지기도 했다.

 

 





 

예술의전당은 올림픽의 해인 1988년 개관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개관 계획은 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이었다. 준공이 늦어진 것은 예술의전당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 때문이었다.

 

설계안을 받아든 예술의 전당은 서울시에 건축허가를 받지 못했다. 정부의 사업이니 일사천리로 진행 될 것으로 믿었으나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예술의전당이 들어설 부지에 일찌감치 터널 공사 계획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의 지시라는 엄포와 함께 타협을 본 결과 터널공사는 도시계획 전체에 따라 잡혀있지만 당장 뚫는 것은 아니고. 예술의전당은 무조건 각하의 임기에 지어야 하니, 그렇다면 먼저 예술의전당 부지 밑으로 아시 공사를 하고 그 위에 예술의 전당을 지은 후에 터널을 뚫기로 하자.

그래서 서울시는 먼저 예술의전당 들어설 지하에 80미터짜리 터널을 뚫었다. 그 뒤 예술의전당이 착공됐다. 터널 뚫는 공기가 2년이 걸렸고 예술의 전당의 준공이 늦어졌다. 그것도 88올림픽 전에 열어야 한다는 청와대의 엄명으로 음악당만 먼저 문을 열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 애잔한 운명의 터널이 바로 지금의 우면산 터널이다.

 

 

 

199912, 예술의전당은 진보적인 기획을 하나 내놓았다. 새천년을 맞는 기념의 일환인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조용필의 공연이었다. 평범한 콘서트가 아니라 오페라극장에서 하는 만큼 뮤지컬 식으로 구성하는 독특한 공연을 구상하였다.

예술의전당 기획은 한국 대중음악의 최고봉인 조용필을 설정했지만 전당측의 우려대로 성악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일개 대중가수의 공연이 가당치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악계의 반발에 이번에는 대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중은 가왕 조용필의 편이었고, 그 덕분에 예술의전당의 과감한 기획은 성공리에 치러졌다. 이후 조용필은 2005년까지 해마다 예술의전당에서 연말 콘서트를 했다.

 

조용필 이후로는 예술의전당은 대중음악인들에게 열리지 않고 있다.







베버 : 무도회로의 초대 O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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