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이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7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벼운 음악회지만 이 음악회는 애호가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콘서트다. 생중계를 하는 나라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관에서 실황상영을 하거나 며칠 뒤 상영하기도 한다. 입장권은 당연 오픈하자마자 매진이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매년 제야음악회를 공연한다. 올해 벌써 25주년인데 일부 클래식 마니아 아니면 그런 행사가 있는 것도 모른다.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도서관에 있다 보면 자신도 지성미 높은 인텔리겐치아인 것처럼 느껴지고, 클래식 공연장에 오면 그 사람들이 죄다 세련된 교양미를 갖춘 사람들로 보이고 그들 속에 함께 있는 자신도 역시 그러한 것처럼 스스로 대견하다. 병원에 가면 죄다 환자인 사람들만 보이고 어쩐지 자신도 성하지 못한 것 같다.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세 번 했다는 건 참 그럴듯하다.
공연은 늦은 밤에 있으니 기다리기엔 좀 긴 시간이다. 경내를 샅샅이 둘러보고는 뒤편 우면산 오솔길도 걸었다. 어스름이 내린다. 날이 매우 쌀쌀하다. 우면산에서 내려온 손이 시리고 곱다. 추위도 피할 겸 카페 <MOZART 502>에 들어 카푸치노를 마신다.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한 눈에 보인다. 커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반백인데 품격이 있어 보인다. 상류층 사람인 게 여실하다. 한눈에 성악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자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굳이 꾸미지 않았는데도 세련미가 풍긴다. 품위 때문일까. 걸친 옷이 명품처럼 어울린다. 확실히 부부는 아니다. 애인도 아니다. 딸도 아니다. 만약 남자가 교수라면 조교나 뭐 그런 관계겠고, 성악가라면 그를 따르는 팬이거나 뭐 그런 관계일 것이다. 여하튼 두 사람 모두 상류층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대중들이 지루해 하면서도 고급으로 인식하는 클래식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나처럼 서민층이면서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고가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한번 구경하기엔 버거운 게 현실이다. 그들 음악가들도 역시 상류층 사람이다. 집에 돈이 제법 있지 않고는 음악공부를 할 수가 없다.
나는 차를 운전하면 클래식을 듣는다. 집에서 컴퓨터를 할 때도 유튜브나 KBS클래식 채널을 깔아 놓고 음악들 들으면서 한다. 이런 나를 재수 없다 여기는 사람도 더러 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들한테 클래식마니아인 척 한다는 거겠지. 그런데 미안하지만 난 고상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클래식을 좋아한단 말이예요! 진짜 좋아하지 않으면 20~30만원 하는 돈을 쓰면서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아요. 가계에 부담은 되지만 좋아하는 것에 들어가는 돈은 아깝지 않은 법이잖아요.
커플이 곧장 걸어 카페로 들어온다. 들어와서는 직원을 찾아 대여섯 명이 잠시 뒤에 올 건데 예약이 되느냐고 묻는다. 아, 목소리 성량과 톤이 내 짐작대로 성악가다. 이따 있을 공연 얘기도 간간히 들리기에 혹 오늘밤 음악회에 출연하는 가수가 아닐까 했으나 공연에서 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 남자는 성악가임이 틀림없다. 상류층 사람이다. 저런 위치에 있다면 아름답고 고상한 여자들이 늘 끊이질 않을 것이다. 지금 같이 있는 그 여자처럼 세련된.
뜬금없이 상류층사회가 선망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들은 저들 세상 외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기껏 8350원 하는 최저시급에 왜 연일 온 나라가 시끌시끌한지 이해를 못할 것이다. 저것들은 왜 빵을 달라고 아우성인가.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면 되지. 빵을 달라고 시위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 프랑스 권력자가 그랬다고 한다.
반백의 남자가 젊고 세련된 여자와 저렇듯 고상한 데이트를 하는 건 누구라도 선망하겠지만 우리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에겐 절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상류층 사회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그렇게 기를 쓰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는 거겠지.
제야음악회는 내 기대만큼의 높이에 맞는 공연이었다. 혹자는 너무 가볍고 진중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비엔나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도 그렇듯이 한해의 마지막 밤을 흥겹고 의미 있게 보내는 나름의 좋은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주최측의 취지도 역시 그럴 것이다. 강남심포니의 연주도 좋았고, 또 역시나 손열음의 피아노협주곡은 백미였다. 멘델스존의 피아노협주곡 1번. 전에 들었을 땐 좀 심심하고 재미없다는 느낌이었는데 역시 현장에서 직접 듣는 음악이 감명을 준다. 고가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특히 라디오에서 목소리로만 들었던 장일범을 실제로 본 것이 신기했고 황수경 아나운서도 역시 그렇다.
자정의 제야행사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커튼콜이 수없이 쏟아졌는데도 앵콜곡은 오케스트라의 피날레, 드보르작의 슬라브무곡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과 함께 소망편지를 단 풍선이 밤하늘 수놓았다. 그리고 화려한 불꽃축제. 이것으로 올해 내 음악회 투어를 끝냈다.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O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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