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KTX를 탔다

설리숲 2018. 12. 9. 23:52


 

 2004년 고속철도가 개통되고 나서 14년이 지났는데 KTX를 한번도 타 보지 못했다. 유행에 둔감하기도 하려니와 유행과는 무관하게 고속철을 이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디를 급하게 다녀올 만큼 업무가 없었다. 다녀온다면 여행인지라 시속 300km로 달릴 일은 없었다.

  내게 여행이란 느림의 미학이다. 사라진 비둘기열차가 늘 그리운 이유다. 목적지로 가는 여정 자체가 여행이고 차창 밖으로 보는 세상의 풍경은 여행의 또하나의 콘텐트다. 더하여 도보여행은 느린여행의 정수다.

 

  그러다가 문득 KTX를 타 보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이러다가 혹 평생 한번도 타보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우정 특정한 목적지가 아닌 순전히 열차를 타기 위한 일정을 잡았다. 어디를 가긴 가야 하니 랜덤으로 부산을 도착지로 정했다. 온전히 기차로만 다닐 것이었다.




 

  충주역에서 충북선을 타고 대전으로 우선 간 다음 게서 대망의 KTX에 올랐다. 뭐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기차가 다 그게 그거지 비싸다고 다를 건 없을 것이다. 다만 속도는 빠르겠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난생처음 기차에 오를 때의 설렘은 당연 없었다.


 떠나는 그 아침에 가을 발 KTX 탈선사고 소식을 들었다. 잦은 사고에도 개의치 않는 게 우리의 속성이다. 하긴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건씩 교통사고가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차를 멀리하고는 생활할 수 없다. 안전엔 이미 무딜대로 무디어진 상태다. 세월호 대참사에도 우리는 여전히 배를 타고, 수없이 접하는 비행기 사고에도 우리는 여전히 즐겨 비행기 탄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망각의 동물이라 하니 빨리 잊히면 잊히는대로 편하게 지내는 거지.

 

  1시간 반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여행이라는 테마를 붙일 수 없는 싱거운 이동이었다. 시시때때로 지나가는 터널에다 풍경이 보일 듯하면 이번엔 방음벽이 창밖 세상을 차단하고 만다. 지역주민도 생활의 불편이 있으면 안 되니 당연 잘된 시스템이지만 KTX여행은 참말 싱겁고 재미없는 여행이다. 책을 꺼냈다. 최고 속도를 지향하는 환경에서 아이러니하게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더듬더듬 읽다가 그것도 집중이 안 되고 짜증이 났다. 말했듯이 터널이 너무 많아 자꾸만 끊기고 만다. KTX는 참 재미없는 여행이다.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쉬면 세상도 쉽니다.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 쉼표입니다.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과 말 사이에 적당한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쉼 없이 달려온 건 아닌지,

 내가 쉼 없이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놓으세요.

 나 없으면 안 될 거라는 그 마음.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




 


 

  강력한 한파가 부산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부산역은 공사 때문에 어수선했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추위가 가득했다.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 남포역에 내렸다.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다. KTX 타 보는 게 주목적인 여행이지만 이왕 부산에 왔으니 내일은 자갈치시장이나 들러볼 요량이었다. 지상이나 지하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순전히 즉흥적이었다. 빨간 산타 모자가 있었다. 가격도 싸기에 그냥 질러 버렸다. 노인네가 되면 여하튼 주책기가 생기는 것이다. 쓰지도 않을 모자를 어찌. 혹 모르지, 어느 날 버젓이 그거 쓰고 나들이하게 또 주책기가 발동할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매운바람이 간단하게 휩쓸고 지나가는 자갈치를 걷는다. 귀때기가 시리다. 이 한파 속에 좌판을 벌이고 앉은 사람들이 눈물겹다. 삶은 결코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뭘 바랄까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거지.

 


  삶의 목표를 열심히 사는 것 아니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하세요.

  열심히는 미래에 마음이 가 있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데에 반해

  즐겁게는 현재에 마음이 있어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

 




  다시 안날의 노정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온다. KTX여행, 그 자체는 심심하고 건조했지만 어쨌든 해 보고 싶었던 것을 하고 난 후의 즐거움은 만족이다. 속도에 가려 매력이 안 보이지만 여전히 기차는 추억과 낭만으로 내게 들어 있다. ‘기차라는 단어도 실은 예전 증기기차를 여전히 그렇게 부르듯이. 증기는 전혀 없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기차라고 하듯이 한번 몸에 깊숙이 밴 습관은 그것이 낡은 것일지라도 고풍스럽고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기차를 많이 타려고 한다.



 기차여행이 좋은 점

 도착과 출발 시간이 정확하다. 교통체증 때문에 연착하지 않는다. 사고만 아니라면.

 먹을거리와 음료가 있다.

 화장실이 있다. 이게 가장 핵심이다.

 승무원이 있다

 많은 승객이 탑승할 수 있다. 만일 대형 사고가 난다면 천국으로 가는 동행인이 많다.



 

  제법 많은 기차 노래가 우리에게 있었다. 거개가 다 사랑과 여행, 그리움, 아쉬움, 이별, 상봉, 그리고 자유... 시적이고 낭만적인 휴머니티 노래들이다. 비인간적인 고속철과는 정서가 멀어졌다. 그 속도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이제 거기 걸맞는 기차 노래들이 나올까.

 


  무소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





 




엘렌 : 떠나는 저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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