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이나 새벽녘에 문자나 전화하는 여인이 있었다.
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였다. 좋아하지만 여자라서 표현을 못한다는 걸 안다.
술을 좋아하고 제법 먹을 줄도 아는 그녀는 지인들이랑 술을 먹다가 어느 정도 취하게 되면 그때 생각나는 내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나는 또 술... 이런 따위 별 내용은 없는 문자지만 그의 머릿속엔 온통 내가 있고, 술기운을 빌어 정인에게 보내는 그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내가 바보가 아니니 그 마음 모를 리 없다. 속 시원하게 답은 못해 주지만 언젠가는 이 여인과 연애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11월이었던가 12월이었던가.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니 아무튼 늦가을 내지 겨울 초입이었다. 여행중이었다. 서울의 어느 모텔에 투숙했다. 객수(客愁) 탓이리라. 내용도 기억 안 나는 문자를 그녀에게 보냈다. 곧이어 답이 왔다. ‘소백산 고치령 도보여행하고 지금 서울에 도착했는데 함박눈이 내리는거 있죠. 그런데 말이야 당신한테 문자가 온거예요. 와우 오늘 여행도 좋았고 첫눈에 당신 문자까지... 대박이에요 생애 최고로 즐거운날...’ 대충 이런 내용의 답신이었다. 모텔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여니 도시의 빛을 받으며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연애할 때가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밤이었다.
지긋지긋하던 눈.
십 몇 년을 정선 숲에 살면서 내리는 눈이 아름다웠던 적이 한번도 업었다. 숲에는 열대우림지역의 스콜처럼 눈이 내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낭만 하나를 잊고 살았었다.
지난 24일에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아주 근사하고 아름다운 폭설이었다. 북한강변 어디쯤에서 이 낭만적인 세상과 맞닥뜨렸다. 글쎄 그토록 웬수 같던 눈이 이렇게도 아름답다니! 지척의 사람을 분간 못하게 쏟아지던 눈을 보며 그동안 둔감해져 있었던 눈에 대한 감성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아직 낭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나도 보통의 감정을 느낄 줄 아닌 사람임을.
예견한대로 그 여인과 연애를 했고 사랑을 했다. 영원토록 지속되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이 실패한 건 아니다. 끝난 사랑도 하나의 완성된 사랑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불꽃처럼 선명한 사랑을 나누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있듯이 헤어져 간 사랑이 더욱 애달프고 고귀한 것.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낭만적인 설경 안에서 예전 그날 밤의 담담하지만 설레던 감정이 우련했다.
하림 :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