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이 생기는 바람에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이 수몰지가 되었다. 강제이주를 하게 되어 아버지가 새로운 세거지를 알아보러 다녀온 곳이 양평이었다.
큰형이 막무가내로 반대하였다. 평생 땅이나 파다 늙어 죽는 농사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당시 큰형은 산골 농촌의 무지렁이 농사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한때는 영화와 영화배우에 미쳐 집을 나가 도시를 떠돌다 돌아오기도 했던 형이었다.
지금은 서울 근교로 갑부들의 전원주택이나 별장 등의 천국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당시 양평은 갈데없는 촌구석이었다. 오죽하면 깡촌 중의 깡촌에 살고 있는 형이 그런 촌엔 절대 안 가겠다고 부득부득 어깃장을 놓았으니까.
그래서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간 게 춘천이었다. 형이 원하던 도시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만들었다.
춘천이 아닌 양평이 내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의 묘한 운명이랄까.
소양강댐은 그보다도 더 내 인생에 크게 관여한 셈이다. 우리가 도시로 나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지만 나도 아버지처럼 농사일로 허리구부정하게 살다가 농부로 여생을 마쳤을까. 원하지 않는 여자와 혼인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그래 살았을까.
어쩌다 양평을 들르거나 지나갈 때면 인연이 될 뻔했던 이곳에 대해 공연히 애틋한 감상을 하곤 한다.
나는 아버지 의중대로 양평으로 이사와서 살았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훗날의 일은 전혀 상상 못하면서도 막연하게 양평이 좋았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단견이지만.
경기도 양평읍 인근에 물안개공원이 있다. 그리고 김종환 노래비가 있다.
순전히 김종환을 위한 공원이다.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하는 그의 노래가 크게 히트하긴 했지만 공원에다가 노래비까지 세워 놓는 건 영 거슬린다.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아직 활동하고 있는 젊은 가수에 노래비와 동상이라니. 게다가 양평 충신도 아니고 단지 지나가다 남한강 물안개를 보고 노래를 썼다는 것으로 마치 가요계의 큰 거목처럼 앙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각 지자체마다 눈에 불을 켜고 어떤 조그만 인연이라도 뽑아내 어떻게든 프랜차이즈화하는 게 근래의 트랜드다.
충주는 남한의 중앙라고 홍보하고 똑 같은 이유로 양구는 국토의 정중앙이라 홍보하는 현실이다. 강릉이 정동진이라 하니 장흥은 정남진이라 포장했다.
김종환보다 훨씬 유며에 있고 인지도 높은 아이유가 태어난 서울, 학교를 다녔던 하남이나 의정부에서도 그녀의 노래비와 공원 따위를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남한강가를 여행하다 뜬금없이 서 있는 김종환 노래비를 보고 고소하였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를 앞둔 고즈넉하고 쓸쓸한 특유의 겨울 강가 풍경은 매력적이었다.
물안개 대신 온종일 전국을 뒤덮은 중국발 미세먼지가 자욱했다.
사드에 보복한다고 자국 국민은 못 오게 묶어 놓고 웬 먼지만 잔뜩 보내왔다.
이러구러 또 한 해를 보낸다. 이젠 송구영신에 별 감상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가 다 똑같은 날의 연속이니 달력이 바뀐다고 특별한 것은 없다.
동지도 지났으니 이젠 낮이 길어지며 여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김종환 작사 작곡 노래 : 사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