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K O R E A

설리숲 2017. 9. 17. 00:25

 

 80년대 한국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던 유로 팝그룹 징기스 칸 (Dschinghis Khan)의 노래들은 좀 독특하다. 당시는 유로댄스가 대세였는데 징기스 칸 노래들은 닭장에서 춤을 추기 위한 노래와는 거리가 있었다. 보니M을 롤모델로 삼은 탓으로 레게를 기저로 하여 경쾌한 노래도 있었지만 아바(ABBA)풍의 스탠다드 팝과 감성적인 발라드풍의 노래도 있었다. 특히 세계의 유적지나 명소, 인물들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많아 댄스음악의 트렌드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마추픽추 하치 모스크바 징기스칸 사하라 로렐라이 이스라엘 사무라이 로마 피스톨레로 차이나보이 푸스타 히말라야 알라딘 등이 그것이다.

 이 다양한 소재의 노래에 맞춰 의상과 퍼포먼스 등 콘셉트도 다양화했다. <피스톨레로>를 노래할 때는 멕시코의 의상을, <하치 할레프 오마르>를 노래할 때는 무슬림 의상을 했다. 이들은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 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쓴 것부터 그런 야망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사견이다. 그러나 이 팀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8년 정도의 굵고 짧은 이력이었다.

 최고의 히트곡인 <징기스 칸>은 한국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다. 조경수가 번안하여 꽤 히트를 쳤지만 몽고제국에 의한 식민역사가 있는지라 침략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불편했고, 더구나 몽골은 공산주의국가였다.

 

 한국에 대한 노래는 없다. 다만 팀이 해체될 무렵에 발표한 노래가 하나 있었으니 유명한 <코리아>. 물론 징기스 칸의 노래는 아니고 팀의 멤버인 레슬리 만도키가 다른 그룹 멤버 에바 선과 듀엣으로 부른 노래다.

 대표곡은 금지곡으로 묶였어도 그들의 한국에서의 인기는 최고였고 한 차례 내한공연도 했다.

 

 만도키가 만든 노래 <코리아>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한국을 홍보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의 군부독재시대였다. 암울한 불행의 시기였지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잇달아 유치함으로써 군부는 일련의 행적을 최대로 부풀렸다. 유사 이래 가장 국운이 상승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우매한(?) 국민들은 이들의 잔치놀음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대중가요계는 애국애족을 선양하는 건전가요들이 봇물처럼 넘쳐났다. 쓸데없는 군더더기지만 생각나는 대로 한번 나열해 보면, 이용의 서울, 오방희의 무궁화,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현숙의 건곤감리청홍백, 인순이의 아름다운 우리나라,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조용필의 서울서울서울, 심수봉의 무궁화 등이 있다.

 이런 노래들이 쉴 새 없이 흐르며 한국사회는 겉으로는 희망찬 선진조국을 눈앞에 보듯 들떠 있었다. 더구나 앞서 열린 LA올림픽에서의 눈부신 성적으로 그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1986년 서울국제가요제에 뉴튼 패밀리와 징기스 칸이 참가하였다(참가라기보다는 초청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당시 참가 가수들의 지명도를 보면 그들을 섭외하면서 적잖은 돈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행사에서 에바 선과 레슬리 만도키가 연정의 눈이 맞았다. 징기스 칸은 독일 그룹이지만 레슬리 만도키는 헝가리 태생이었기에 같은 조국의 에바 선과는 남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귀국 후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인연을 맺어준 한국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만든 노래가 <코리아>.

 이렇듯 서울올림픽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군부당국은 올림픽을 앞두고 이 노래를 홍보음악으로 널리 사용하였다. 한국에 대한 노래가 전무했으니 구세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아이돌 그룹 소녀대가 번안하여 불렀다. 그것을 기회로 소녀대가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였으니 한국에서 노래를 한 최초의 일본가수가 되었다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이듬해 마지막 서울국제가요제에 두 사람이 참가하여 이 노래를 열창하였고 그들의 한국사랑에 도취된 한국국민들도 열광하였다. 이후 아리랑을 믹스해 첨가한 버전의 노래도 발표하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하고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

 레슬리 만도키는 자신의 노래 한 곡이 금지된 나라에서 가장 열렬한 환대를 누렸으니 이것도 아이러니하다고 표현할지.

 

 징기스 칸은 코믹한 무대연출을 하는 그룹이었는데 레슬리 만도키의 <코리아>는 제법 진지하고 진중하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노래다.

 오늘 917일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한 날이다. 올림픽과는 상관없는데도 이 노래를 들으면 곧바로 연상되고 만다. 속으론 곪았지만 겉으로는 화려했던 한 시대였다. 내 인생도 그랬다.

 

 

 

 

 

레슬리 만도키 & 에바 선 :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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