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오빠 생각

설리숲 2017. 8. 11. 00:51

 

 그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계셨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 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 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 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줄게'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오빠는 뜸북새, 뻐국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오빠 생각>의 노랫말을 지은 고 최순애(1914~1998)의 생전 인터뷰다.

 과수원 집 딸이었던 소녀는 날마다 과수원 밭머리에 나가 그리운 오빠를 기다리다가 울며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것을 시로 적어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에 투고를 하여 입선했다. 그때 최순애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최순애는 <고향의 봄>의 작가 이원수와 결혼을 했다. 이원수는 최순애가 입선을 한 다음 해에 역시 같은 잡지에 시를 투고하였는데 그것이 <고향의 봄>이었다. 소년의 나이는 그때 열여섯 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소녀가 소년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두 사람의 펜팔이 이어졌고 얼굴도 모르는 채로 장래를 약속하였다. 사랑은 내내 편지로만 이어졌는데 7년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두 사람이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약조하였다.

 그러나 이원수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서회 활동을 하던 그는 일경에 의해 불온분자로 찍혀 1년간 옥살이를 하였던 것이다. 여자의 집에서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최순애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원수가 출옥한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으니 1936, 이원수는 스물여섯, 최순애는 스물셋이었다.

 

 

 동요라 하기에는 노랫말과 곡조 공히 지나치게 애상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공동체마을에 있을 때 딸을 둘 데리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큰 아이 이름이 다솔이었다. 이 아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배웠다며 나더러 이 노래 알아요? 하며 노래를 하나 불렀다. 오빠 생각이네, 하니 어 아저씨도 알아요? 그럼, 이 노래 유명한 건데. 그렇구나, 난 우리 선생님이 가짜로 만든 노랜 줄 알았어요, 노래 좋지요? 근데 너무 슬픈거 같애요.

 

 세 부녀는 그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주인 격인 사람과 트러블이 있어 내내 부딪치더니 결국 짐을 싸 떠나고 말았는데 떠나기 전날 저녁 다솔이는 계곡에 나가 앉아 이 노래를 부르며 울음을 토했다. 가을밤이었다. 그때 이 노래가 지나치게 비창하다고 느꼈었다.

 노래의 사조가 신파조의 창가(唱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시대의 노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 : 오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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