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리스트를 듣는 밤

설리숲 2017. 4. 8. 01:23

 

원각 스님은 출가한 후에도 한동안 속세에 나와서는 스님이란 소리를 못 들었다. 20대부터 차를 만들어 그때부터 함께 했었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속명이 입에 붙어 스님이란 존칭이 어색했을 것이다. 어엿하게 계를 받은 스님인데 ○○! 하고 동네 아이들 부르듯이 했다. 이해는 하지만 옳지 않다.

 스님은 나이로는 나보다 후배지만 차 경력으로는 10여년이나 앞선다. 2005년에 그를 처음 만났다. 출가하기 전이다. 나하고는 여러 면에서 잘 맞지 않는 타입이다. 성격도 마인드도 가치관도. 순전히 내 입장에서 말하면 사가지 없는 놈이었다. 당연히 친해지지도 않았고 둘 사이의 대화도 별로 없었다. 나는 그를 아무개 씨라고 이름을 불렀는데 그가 특별히 어떤 호칭으로 나를 부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불가에 귀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은 놀랐다. 평소의 성격상 그곳의 수행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아주 부정적인 인상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부처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에도 봄철이면 단 며칠이라도 다원에 다녀가곤 했다.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예전처럼 ○○! 하고 불렀다.

 나는 진정으로 존경을 담아서 스님이라 부른다. 스님도 나를 처사님이라 높여 부른다.

 

 이름과 호칭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형식적인 껍데기가 아닌 것이다. 원각 스님을 ○○! 하고 부르면 그는 스님이 아닌 ○○일 뿐이고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처럼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스님이라고 부르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스님처럼 되어 간다.

 

 다원의 주인 되시는 분을 우리는 선생님으로 부른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사장님이라 한다. 그들 중 묻는 사람이 가끔 있다. 왜 선생님이라 부르지요?

 사장님이라 부르면 그 관계는 기껏 사장과 일꾼의 관계에 머문다. 상대를 높임으로써 결국은 나도 높아진다. 시정잡배들처럼 함부로 해대면 결국 나도 그 프레임 안에 갇혀 똑같은 수준의 부류가 된다. 같은 또래라도 절대 상대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존댓말을 하는데 상대가 반말을 할 수는 없으니 결과는 서로가 이득인 것이다.

 

 나이 좀 있다고 첨보는 사람에게도 하대를 하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 먹은 걸 무슨 큰 벼슬로 아는 사람들이다. 60대 중반인 권 선생님은 어린 사람들에게도 꼭 존댓말을 한다. 그것에 큰 감명을 받아 나도 그러려고 노력한다.

 내게 아주 극진히 잘해 주는 사람을 함부로 욕되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니 어떻게 보면 처세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듯하다. 말 한마디 정중하고 극진하게 하는 것만이라도 존경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겠다.

 

 원각 스님과 나는 여전히 친하진 않다. 그러나 예전에 가졌던 부정적인 마음은 다 가셨다. 작년 봄, 우전을 마치고 승방으로 돌아가는 날 비가 내렸다. 마을 느티나무 아래 우산을 받고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걸 먼발치로 보고 있는데 까닭 모르게 울컥 하며 눈물이 나려 했다. 우리들의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는 것이 새삼 가슴에 젖어든다. 버스가 도착했다 떠나고 난 느티나무 아래는 텅 비었다. 그 자리엔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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