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솔사.
어떤 이끌림인가.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한 사찰이 다솔사다. 가까운 곳이어서는 아니다. 강원도에 살 때 누구가로 인하여 심신이 공허했을 때도 먼 남쪽 다솔사엘 다녀왔었다.
근년엔 한 해 한 번씩은 다녀온 것 같다. 꿀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풍경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무심히 마음이 끌리는 것.
다솔사는 국내 흔치 않은 와불이 있다. 그리고 진신사리를 모셨다. 누워 있는 부처 뒤로 사리탑이 있다. 작년엔 연심의 여인과 이 사리탑을 돌았다.
다솔사는 선차도량이다. 우리 차와 함께 그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차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지푸라기 자료라도 더 있을까 하여 지난 봄 찾았을 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다 늦은 저녁 무렵인데다가 온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으로 차밭이 어웅하게 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올겨울 가장 강력한 한파의 나날이다. 맹렬한 추위 속에서도 늘 푸른 차나무의 고고함이 미쁘다. 일주문 없는 들머리는 울창한 나무숲이다. 밑의 글에도 있듯이 터널 같은 길이다. 이 길에 서면 정신이 맑아져 그때 문득 세계 모든 것은 空이다.
다솔사의 덖음차는 봉명죽로(鳳鳴竹露)라 하고 발효차는 황봉운하(黃鳳雲霞)라고 한다.
이곳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차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 제다를 언제 견학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음. 여름이 성큼 다가왔군요.
다솔사 가는 길, 천지는 녹색입니다. 눈을 찌르는 그 색은 혈관까지 들어와 온몸을 푸르게 흐를 것만 같습니다. 하늘을 메운 아름드리 적송과 산나무 전나무 길은 숫제 터널처럼 가운데만 뻐끔히 열려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이었던가요? 참나무도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고 했던. 시원한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느냐고, 영혼은 기슭에 출렁이는 바다를 둘지언정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고 했던. 하지만 다솔사 가는 길의 나무들은 서로 기대고 얽혀 그늘 속에서도 청정하게 자라 하늘로 뻗어 올라가고 있군요.
숲길을 가도 가도 일주문은 보이지 않지만 죽향차 향기만은 가깝게 느껴집니다. 차향기가 가깝게 느껴짐은 절이 또한 멀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차선일미(茶禪一味)라고 했던가요. 예로부터 다솔사는 하동 쌍계사와 더불어 차 시배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지금쯤 와룡산 기슭의 어느 차밭에서는 솨아 지나가는 저 솔바람 속에서 누군가 허리 굽혀 찻잎을 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깊은 밤 독경소리... 별무리 속으로 퍼져가네
하지만 다솔사가 쌍계사와 닮은 점이 비단 차만이 아닙니다. 두 절은 우리 문학의 한 탯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닮았습니다. 작가 김동리는 생애에 걸친 두 편의 걸작 ‘등신불’과 ‘역마’를 각각 이 두 절의 시절인연 좇아 지어냈지요.
저만치 숲에 둘러싸인 고찰이 보이는군요. 이 천년 고찰은 그러나 여염 절 같지 않고 마치 어느 벌죽한 종가(宗家)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아름드리 큰 기둥으로 몸 받치고 있는 웅장한 대양루 때문에 더 그런 느낌으로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의 저 고졸한 맞배집은 해방 전후로 청년들에게 민족종신을 함양하는 도장이 되거나 교육장이 되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 다솔사는 한때 승려시인 한용운, 사상가이자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 정치가 김법린, 화가 허백련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거나 은거지 삼아 수년씩 머무르기도 했던 처소였습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한용운, 김범부, 김법린 같은 우국지사들은 이 울울창창 숲속의 집에 모여서 나라를 걱정하고 독립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다솔사는 비밀결사와 같은 처소였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떠났지만 그의 회갑축하연이 이 다솔사에서 베풀어졌을 때 기념식수했다는 황금 편백(扁栢)은 지금도 경내에 살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해가 썼던 한시들은 훗날 미당이 번역해 엮어 내기도 했지요.
어느 날 신인 소설가 김동리는 당시 이 절에서 마을에 세운 광명학원의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절에 올라가 만해 일행에게 인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날 주지 범술이 베푼 다회(茶會)에서 끓은 잎차가 다완에 부어지는 동안 만해는 중국 고승전에 나온다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충격적인 그 이야기를 동리는 훗날 소설 ‘등신불’로 엮어 내었던 것이지요.
머리 위에 벌겋게 단 불덩어리 향로를 쓰고 합장한 채 자기 몸을 스스로 불태워 성불에 이른다는 이야기에 동리는 ‘몸에 소름이 끼치고’, ‘아래턱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충격을 그이는 만적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내세워 형상화시키게 되면서 ‘등신불’은 태어났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전화와 1914년 겨울밤의 대화재를 겪으면서도 대양루는 용케 살아남아 아직 그 노후된 몸체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한때 일세의 호걸들을 그 품에 거느렸으나 이제 파랗게 이끼 긴 세월의 무게를 홀로 지고 있는 건물은 어쩐지 애잔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산에는 일찍 저녁이 옵니다. 만해가 머물며 시를 썼다는 응진전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어둑신해지는 경내로 올라오던 한복 차림의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렸을 적 절 아래 평촌 마을에 살았다는 정채용 노인(75)은 신기하게도 사상가 김범부 선생에 대해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때 제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주지 최범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광명학원 선생이었던 청년 김동리가 마라손을 아주 잘했다는 것까지도 생생하게 짚어 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한숨처럼 말했습니다. “인물들이었지... 요샌... 인물 만나기가 어려워...”
인물을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걸출한 문학작품을 만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치열하게 인간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꿰뚫는 그런 작품 말입니다. 문학의 흐름 역시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쪽으로 흘러가 처절한 황홀함과 전율할 것 같은 감동의 ‘등신불’ 같은 작품을 만나기는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다솔사에서 쉬엄쉬엄 오르막을 올라가면 봉일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가 나옵니다. 암자의 일대는 가느다란 풀벌레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합니다. 섬돌에 정갈한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놓인 방안에서는 어쩌다 낮은 기침소리가 들려올 뿐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맛보는 적막이고 고요입니다.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오르내리기도 했던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라는 작품을 썼지요. 그리고 작가는 할복자살하여 생애를 마칩니다. 불타는 금각사와 미시마의 할복을 흔히 일본인들은 소멸의 미학으로 예찬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본식 무사풍의 죽음보다는 불덩어리 이고 죽어가는 등신불의 죽음이 훨씬 더 탐미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음. 대숲에서 올라오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지고 하늘엔 별들이 떠오릅니다. 어디선가로부터 청아한 독경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별무리 속으로 퍼져나가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슬퍼집니다. 육신을 불태우면서 생로병사의 고뇌라면 누군들 그 고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어쩌면 스스로의 육신에 불붙이기 전에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이미 불길이 붙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타오르는 거대한 화택(火宅) 안에 있는 슬픈 존재들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유홍준. 2001년 5월 30일. 조선일보)
대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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