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음악 이야기

하얀 목련이 진다

설리숲 2017. 4. 5. 20:48

 

 양희은은 젊었을 때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요즘은 우선 외모가 가수 되기의 첫 번째 조건이다. 아주 잘못된 패러다임이다. 가수의 정체는 노래다.

 양희은은 스스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넉살좋게 자인하곤 했다. 70년대의 여가수들 중에 빼어난 외모의 사람은 별로 없다, 정말 노래하는 가수였다. 그렇더라도 외모에 대해 예민한 게 여자라 너도나도 예뻐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양희은은 그것에서 초월해 있었던 것 같다. 블라우스나 티셔츠에 청바지 따위의 소박한 차림이 보통이었다. 애써 예뻐지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70년대 어느 때 월간지 <샘터>에 기고한 글을 보았다. 거기서도 외모를 스스로 평하면서 이러다 시집 못갈 수도 있겠다는 것과 그렇지만 그것에 연연하지도 않는다는, 어쩌면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인연이 나타나면 행복할 테지만 그것에도 달관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담담한 글을 읽고 양희은이 좋아졌다.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니라 소박한 그 마인드가 가슴에 들어 있다가 이후로 좋은 노래가 나올 때마다 그 노래에 실려 점점 그의 매력이 배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양희은이 좋다. 그의 바람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고 인생의 어른이 된 지금 그의 노래는 점점 원숙해 자연과 인간과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봄 이맘때면 듣는 노래 <하얀 목련>이다. 그에게 암으로 생사가 불투명한 때가 있었다. 그 봄에 병동의 창문 밖에 환하게 핀 목련을 보고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머지않아 사라질 생명에 대한 공포와 어쩔 수 없는 체념과 그간의 짧은 삶의 되새김 등이 그의 시간을 얽어매고 있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그 심정을 공감해 본다.

 

 창밖의 공간이란 눈에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절의 세계이다. 그곳은 방안의 상황보다 나은 것일 수도 있고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럽고 비열한 것을 보지 않으려면 창문을 닫아 버린다. 내가 어둡고 고통스러울 때 창밖의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우리는 창을 통하여 그 미지를 봄으로써 치유를 받기도 한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그런 창문의 존재가 확실하게 설정되었다. 창밖의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걸 보면서 죽음의 공포에 빠지지만 결국은 잎 새 하나가지지 않는 걸 보고 생의 의지가 솟는다. 창은 플라시보와 노시보 효과를 동시에 전해주는 이중적 매개체인 셈이다.

 

 오 헨리의 창은 가을이고 양희은의 창은 봄이었다. 가을은 조락 곧 죽음이고, 봄은 소생이다. 절망적인 고통 그 황량한 나날들이었지만 창밖 목련 꽃잎의 화사함에서 그는 생의 화려한 소생을 보지 않았을까.

 

 목련의 꽃말은 숭고한 사랑이라 한다. 다른 꽃들과 목련은 만개한 꽃송이보다 오므린 봉오리가 더 예쁘다. 이제 이 꽃잎도 다 지고 없다.

 오늘 봄비가 아주 푸지게 내린다. 어제 화려하던 벚꽃도 이 비에 다 지고 말면 서운할 텐데.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아픈 가슴 빈 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양희은 작사 김희갑 작곡 양희은 노래: 하얀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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