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짠지와 무

설리숲 2017. 1. 17. 23:36

 

 

 우리 시골에서는 짠지였다. 김치란 말을 안 썼다. 대신 물김치를 김치라고 했는데 김치도 아닌 짐치라 했다.

는 김치라는 뜻이다. 짠지 묵은지 싱건지 단무지 오이지 등등. 근데 우리는 왜 짠지라 했는지 모르겠다. 추운 강원도 김장이라 그리 짜지도 않았는데.

 

 어머니는 또한번 큰 행사를 치렀다. 식구들의 한 해 먹을거리였으니 메주 쑤기와 더불어 김장은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김장 하는 날은 그저 추웠다는 기억 밖에 없다.

 동네 아낙네 두엇이 도와주고 누나들이 더러 거들고 해서 여자들의 몫이 끝나면 이후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구덩이를 파서 항아리를 묻고 긴 장대로 골격을 세우고는 미리 엮어 둔 잇짚 이엉을 말아 올려 오가리집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김치광은 겨우내 삭풍과 폭설을 다 맞고 짠지를 지키고 섰는 것이다.

 

 살을 에는 겨울날 짠지를 꺼내 오는 일은 고역이었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에 맨손으로 얼음 투배기인 그것을 꺼내다가 도마에 올려놓고 썰었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지만 어머니들은 그걸 고통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부터 늘 그래 왔다. 식구들 먹이는 일이니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꺼내서 밥상에 오른 짠지는 얼음이 버적버적 씹혀도 왠지 맛이 있었다. 아니, 맛있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랬을 것 같다는 게 정확하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김치를 싫어한다. 우리 역시 마늘냄새 생강냄새 역겨운 그것을 잘 안 먹었다.

 

 긴 겨울 시골에서는 먹을 게 주렸다. 김치광과는 별도로 구덩이를 또 파서 거기에는 무를 저장했다. 구덩이에 얼기설기 나뭇가지를 걸치고는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소처럼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내어 거기에 맞게 잇짚을 묶어 뚜껑을 만들어 닫았다. 곁에는 긴 쇠꼬챙이를 항상 꽂아 두었다. 꼬챙이로 무를 찔러 꺼내는 것이다.

 군것질거리가 궁한 아이들은 겨울밤에 정 먹을 것이 없으면 무를 꺼내다 깎아 먹곤 했다. 처음엔 그것도 맛이 제법 있었으니 구덩이에 묻고 시간이 지나면 맛이 없었다. 딴엔 저장을 잘 한 것 같아도 바람이 들어 푸석하거나 겨울이 깊어가면서 무도 얼어 버리기 일쑤여서 얼었다 녹은 무는 싱겁고 푸석푸석하고 그냥 두부 씹는 기분이었다.

봄에 땅이 풀릴 때쯤이면 땅광에 무는 여전히 많이 있어도 얼거나 썩어서 거의 폐기처분하곤 했다.

 

 봄바람이 불어 날이 훈훈해질 무렵이면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김치광 오가리집이 없어져 버렸다. 겨우내 뒤란 그 자리에 있던 풍경에 익숙한 눈이라 휭하니 텅 빈 느낌이 묘하게 허전했다.

냉장고가 없었으니 그 다음부터 짠지는 시어 고부라지기 시작했다. , 그러고 보면 짜지 않았다는 건 순전히 내 생각이었지 객관적으로는 짠지답게 정말 짜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봄 해토머리부터 사뭇 시어지니 조금이라도 덜 시게 일부러 짜게 김장을 했을 수도 있겠다.

 

 강원도 김치는 담백하다. 순전히 배추와 무로만 담근다.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는 젓갈을 넣는다는 걸 알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에 김치에 고기를 넣다니! 비린내가 나서 어찌 먹을까. 실제로 강원도 사람들은 다른 지방의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원도의 산골에서야 젓갈이니 생선이니 하는 것들이 귀하니 그 지방 특성대로 고유의 김치를 만들어 먹었으니.

 

 김치문화도 완전히 평준화돼서 비린내 나서 못 먹겠다던 사람들도 그 후로 다른 지방의 김치를 즐기게 되었고 강원도에서도 젓갈을 쓴지 오래다. 일부 깊은 산골의 할머니들은 여전히 옛 관습대로 담백한 김치, 즉 짠지를 담그고 있다.

 

 짠지의 맛은 기억하지 못한다. 눈발 날리는 추운 겨울날 짠지를 꺼내오던 형수의 새빨갛게 언 손은 기억난다. 그리고 버적거리며 씹히던 얼음, 겨울밤 추워서 나가기 싫은 걸 억지로 떠밀려 어둠 속으로 무를 꺼내러 나가던 누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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