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굴욕의 기억

설리숲 2016. 8. 23. 00:09

 

 골안인지 아니면 그 어름인지 집은 몰랐다. 승호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이도 내 또래인지 두어 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한 번 스쳐지나가거나 먼발치서 보기만 했을 뿐 같이 어울려 놀아본 적은 없다. 어른들은 그 아이를 놀리는 걸 즐겨 했다. 미루어 짐작하여 그 아이는 약간 둘된 아이였을 것이다. 내 어린 눈에도 말투가 어눌하고 행동이 굼떠 보였으니 짐작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였고 조금 늦되는 경우도 많으니 후엔 어땠는지 모른다. 짧은 유년시절 말고는 평생 볼 수가 없었고 풍설로도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사람들 말로는 그 아이가 식탐이 많아서 밥을 엄청 많이 먹는다고 했다. 그 아이는 보면 늘 배가 불룩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사람들 말처럼 밥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하면 그 아이는 위하수증이나 그에 준하는 다른 질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와의 기억은 단 하나였다.

 어느 때 놀다 집에 들어가니 무슨 일인지 아주머니들이 방에 잔뜩 모여 앉아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뜻밖에 승호가 와 있었다. 제 엄마를 따라왔을 것이다. 마침 수다에도 싫증을 느끼던 마을 여자들이 다른 재밋거리를 생각해 냈다. 나와 승호를 싸움을 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간악한 짓거리였다. 저들의 재밋거리로 애먼 아이들을 싸움을 시키다니.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 나는 싫은 표정으로 어기대고 섰고 여자들은 아무래도 나보다는 어수룩한 승호를 더 부추겼다. 집요하게 용춤 추이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나는 느꼈다. 승호가 좀 강하게 뻗대길 바랐지만 여자들의 손아귀에 걸려든 이상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이 된 것을 감지했다.

 

 자존심을 포기하고 내가 싸울 의지를 보이자 그 기운에 승호도 전의가 일었는지 여태까지 바보같이 히죽거리며 서 있던 태도를 바꿔 싸움을 걸어 왔다. 둘이 맞붙었다싶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가 먼저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일어나 다시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껴안고 제가 뒤로 넘어졌다. 여자들은 재밌어 죽겠다고 난리다. 매번 그러게 자바지고는 일어나고 나를 껴안고 또 자빠지고를 반복했다. 승부는 뻔했다. 번번이 방바닥에 드러눕는 승호의 위로 나는 힘 하나 안 쓰고 올라타곤 했으니.

 그것은 참말 온당치 않은 게임이었다. 시작도 온당치 못 했고, 시작과 함께 승부가 갈린 게임이었다. 그 아이가 나를 껴안은 순간 나는 그 힘에 압도되었다. 정정당당한 겨룸이었다면 나는 그의 힘과 덩치에 대번에 나자빠져 울면서 패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호는 그러질 못했다. 그 자리의 분위기는 그가 져야 했다. 우선은 우리 집이었다. 똥개도 제 동네에서는 반은 이기고 들어간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온 집에서 그 집 아이와의 싸움은 애초 승산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분위기를 느꼈다. 지랄 맞은 여자들이 원하는 건 나를 이기는 게 아니라 모자라서 늘 놀림을 받는 자기가 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애초 나를 이길 생각이 없었다. 능글맞은 여자들의 부추김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었지만 그러면서 그도 부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를 껴안고 뒤로 자빠지고 여자들이 왁자하게 웃어댈 때 굴욕과 수모를 느꼈을 것이다. 다만 그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늘상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놀림을 받는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재밌게 자빠져 주는 것 밖에.

 

 그 게임을 끝내고 나서도, 그 후로도 승자인 나는 사뭇 기분이 언짢았다. 패자인 그는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를 생각한다. 우리들은 어린아이였지만 또 승호는 남들이 약간 모자란다는 아이였지만 감정은 지니고 있는 인격체다. 어른들이 정말 나쁜 짓을 벌인 것이다. 개싸움이나 소싸움과 같은 것이다. 죄 없는 개나 소들을 싸움 붙여 놓고는 흥분하여 날뛰는 인간들의 표정을 보았는가.

 

 누나들이 그 일화를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그럴 때 그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며 마음이 언짢아지곤 한다. 아이들에게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있다는 걸 어른들은 왜 무시하는 걸까.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어찌 살고 있을까. 당시에도 비정상적으로 배가 나와 있던데 혹 그것 때문에 평생 역경의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아님 살아 있기는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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