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처럼 몹시도 외롭던 날에,
마른 빵을 물도 없이 꾸역꾸역 삼키다가 울컥 목울대를 지르박 듯 눈물 비죽 흘리던 그날, 섬진강 강가에선 밤새도록 노랫소리 들렸다.
살인적인 더위는 밤과 낮을 안 가리고 숨통을 조이고 갈대밭이든 시궁창이든 사방에서 몰려나온 모기들이 기승을 떨치는 여름날이건만, 나는 덧없이 사라져가는 가을날의 낙엽처럼 몹시도 스산하고 쓸쓸했다.
역전 여인숙.
온몸으로 흐르는 땀으로 목욕을 하며 손바닥만 한 창문도 없는 3,000원짜리 그 여인숙에서 늦도록 잠을 못 이루고 강가 어디서 또 나처럼 고독한 청춘이 불러대는 노래를 들었다.
화개장으로 가신다꼬예?
전라도 땅인 구례에서 여인숙 아지매는 경상도 말을 했다.
장날이 언제지요?
장은 1일 하고 6일인데예.
그깟 장날이 내게 무슨 대수더냐. 그저 평사리를 가고 싶었을 뿐이다.
연인이 될 줄 알았던 그 여자는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전화도 안 받고, 물어물어 찾아간 집은 그러나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없었다.
이번 봄엔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를 가고 싶어. 전부터 늘 생각만 했었는데... 같이 갈래?
나보다 세 살이나 연상이던 그 여자는 추운 겨울이 끝나면서 열일곱 소녀처럼 들떠 평사리 갈 날을 헤아렸다. 그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던 어느 날 구례행 기차를 타고 그곳 섬진강으로 갔다. 어느덧 길섶은 무성하게 풀이 자라고 꽃이 져 버린 벚나무에도 파란 잎이 돋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가고파 했던 평사리는 결국 가지 못하고 화개와 칠불사 쌍계사 일대를 도는 것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마쳤다.
결단코 연인은 아니었다. 그 2박 3일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그 여자가 연인이 되어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내게도 사랑이 왔구나.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그 황홀한 느낌.
그랬는데.
연인이 된 줄만 알았던 그 여자가 가뭇없이 사라진 것이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또 있을까. 한동안 공황에 빠져 비척거렸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는데 내 가슴 안에는 찬바람만 휭하니 불었다.
평사리를 가자. 거길 가봐야 뭐하겠나.
고민하다 그 여자와 같이 몸을 실었던 기차에 혼자 올라탔다.
그리고 구례구 역 앞 여인숙에서 밤늦도록 뒤척이며 악쓰듯이 불러대는 그 노래들을 들었다.
결국 평사리는 또 못가고 말았다.
이튿날 핏기 서린 눈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 화개행 첫 차를 탔다. 밤새 모기에게 뜯긴 살가죽이 발긋발긋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지리산을 가려는 여행객들이 버스를 가득 채웠다. 화엄사 입구에서 그들이 우루루 내리고 버스에는 나를 포함한 두엇이 남았을까.
기사 아저씨, 잠깐만요!
왜 그랬는지 모른다. 화개를 가려던 생각이 순간 돌변하여 나도 이 사람들처럼 지리산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2박 3일의 지리산 종주를 마쳤다.
평사리는 그로부터 16년이나 지나서 가 보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 평사리행을 포기한 건 아마도 두려워서였을 것 같다. 그 여자로부터 철저하고 완벽하게 버림받은 후에 나는 어디론가의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떠나온 여행길인데 막상 평사리를 코앞에 두고는 상처가 덧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을 것이다.
16년이 지나서야 가 본 평사리는 문학작품에 나오는 그런 고전적인 마을이 아니었다. 그저 관광객이나 불러 모으려고 현대식으로 꾸며 놓은 여느 관광지하고 다름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연인이 된 줄 알았던, 세 살이나 연상인 그 여자가 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생각하면 황당하고 허탈한 경험이지만 그로 인해 나는 섬진강과 그 일대를 알게 됐고 언젠가는 찾아갈 마음의 고향으로 남겨 두었다.
역전 그 여인숙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는 없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다. 여인숙은 아니더라도 세련된 모텔이라도 있지 않을까.
거기서 자는 그 밤에 강가에서 그 누가 밤새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구례에는 기차역이 없다. ‘구례의 입’이라는 이름의 구례구역(求禮口驛)은 순천 땅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을 가려 하는 사람들은 밤기차를 타고 이 구례구역으로 들어온다.
다시 오랜만에 찾아왔다. 역시 예상대로 옛 여인숙은 없어졌다. 그 집이라 짐작되는 낡고 오래된 건물이 보기 흉하게 강을 벽지고 서 있었다. 그렇더라도 세월이 이만치 흘렀거늘 역 주변의 풍광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역사만이 새로 지어졌을 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어느 새 여름이 가까워졌다.
그날,
살인적인 더위가 밤낮을 안 가리고 숨을 막고 갈대밭이든 시궁창이든 달려드는 모기들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언만,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처럼 몹시도 허허롭던 날에,
구례구역 앞 여인숙.
온몸으로 흐르는 땀으로 목욕을 하며 손바닥만 한 창문도 없는 3천 원짜리 그 여인숙에서 늦도록 잠은 못 자고, 섬진강가에서 어느 고독한 청춘이 불러대는 노래가 들려왔다.
마른 빵을 물도 없이 꾸역꾸역 씹어먹다가 목구멍에 잠깐 눈물이 나왔을 뿐, 결코 외로워서 눈물이 난 건 아니었던 그날,
어떤 놈인지 기타를 두드리며 악을 쓰듯 부르는 노래가 왠지 슬프고 비장하게 가슴으로 들어왔다.
어느 젊은 청춘이 저리도 고독하고 애절할까.
그보다도 절대 지치지 않을 것 같은 그 왕성한 혈기가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 밤이었다.
그는 얼마나 더 그리 악을 써댔는지 나는 까무룩이 잠에 빠져들었다.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인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시는 큰스님 다비하는
불꽃인가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정호승 : 낙화
구례구역은 창문 밖 섬진강가에서 들리던 노랫소리만으로 강렬하게 남았다.
그 여인숙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는 없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은 허랑한 선망이 생겼다.
그 밤에 강가에서 그 누가 밤새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여인숙은 없다
눈 내린 겨울에도, 매화 목련 흐드러진 봄에도 구례구역 정경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제는 밤기차가 없다.
무시로 용산에서 떠나는 밤기차를 타고 호남으로 가곤 하던 옛 추억이 사라졌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영시 오십 분 대전발 목포행 완행열차도,
다섯손가락의 <새벽기차>도 노래로만 남았다.
예전에 우정은 친구랑 구례행 기차를 타고는 잠이 들었단다.
비몽사몽 잠결에 ‘이번 역은 삼례역입니다’라는 차내방송을 듣고는 삼례니까 구례까지 여섯 정거장 남았다고 둘이서 속닥거렸다고.
쇠똥 구르는 것만 봐도 깔깔거린다는 젊은 날의 이야기겠다.
기차는 저녁 일곱시에 떠나네
이렇게는 일렁이는 강물 다 놔두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노을 다 놔두고
기차는 저녁 일곱시에 떠나네
저렇게는 우뚝한 산봉우리 다 놔두고
산정 위에 막 돋는 별들 다 놔두고
네가 가고 나는 남은 이 저녁 역에서
외로움은 산 속 깊은 쑥국새 소리
그리움은 강심 깊이 숨어드는 숭어떼빛
기차는 저녁 일곱시에 떠나네
저렇게는 산모퉁이를 도는 기적 소리에
이렇게는 강물도 떨리는 푸르른 저녁
고재종
이미랑 : 구례구역의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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