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초였다.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 단신으로 피란을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할 수 없이 어린 딸과 피란길에 나섰다. 서울 미아리고개를 막 넘었을 때였다. 허기를 견디지 못한 어린 딸이 자욱한 화약연기 속에 숨을 헐떡이다 그만 명줄을 놓고 말았다. 오열을 토해내던 아내는 정신을 차려 딸의 시신에 간신히 흙을 덮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남편과 재회한 것은 서울이 수복되고 몇 달 뒤였다. 어느 겨울날, 남편은 아내와 함께 딸이 묻힌 미아리고개 근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딸의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얕게 묻어서 이리 저리 발끝에 차이다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여겼다. 남편은 비통한 마음에 아내의 손을 붙잡고 오래 울었다.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딸을 잃은 반야월의 아픈 상처 속에서 만들어졌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 간다. 목숨과 재산과 그리고 인간. 인간성의 파멸. 전쟁은 컴퓨터 게임하듯 즐기는 유희가 아니다. 전쟁의 잔학과 아픔보다도 우리에게는 사창가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미아리 점성촌은 1966년 이도병 역학사가 이곳에 입즈한 것이 그 시초이며 1980년대 점집수가 70여 호가 될 만큼 호황기를 누렸으며 현재는 18호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 점성가들 대부분은 시각장애인으로 역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그 이론을 토대로 점을 본다. 그것은 샤머니즘에 기초한 영점(靈占)이나 신점과 달리 유교 경전인 주역(周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고 전쟁의 아픈 상처였던 이곳도 지금이야 그 흔적이 없다. 다만 미아리예술극장 옆구리에 이 노래비 하나 세움으로써 문득 그 대를 상기해 볼 분이다. 이 노래비도 으슥하게 움푹 들어간 곳에 있어 그나마 행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국민학교 어릴 때 집에 여느 집에 없던 전축이 있었다. 이 노래 그때 참 많이도 들었다. 대놓고 뻐기진 않았어도 내심 집에 전축이 있는 게 다른 애들한테 무척 자랑스러웠는데 부잣집인 건옥이네도 전축을 들여 놓았다. 우리 꺼랑 비교가 안 되게 삐까번쩍한데다가 그 음질 또한 세련되고 웅장해서 그 집 앞을 지날 때 밖에까지 쾅쾅거리곤 했었다. 어린 꼬마 그때 위화감을 느꼈었다. 그 전축으로 듣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참으로 좋았었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 단장의 미아리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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