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쎄시봉>을 주제로 한 TV프로그램에서 윤형주가 그랬었다.
"나도 윤동주의 시로 노래를 작곡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절대로 손을 못 대게 했다. 흔쾌히 허락하실 줄 알았는데 한참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가 - 시도 노래다. 그 자체가 노래인데 네 잘난 작곡으로 시를 건드리지 마라 - 1400곡의 CM송과 120곡의 가요를 만든 내가 윤동주 형님의 시만 노래를 못 만들었다."
윤동주 시인은 윤형주의 육촌 형이다. 함께 출연했던 조영남이 머쓱해지는 장면이었다. 이미 91년에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발표했던 조영남이다. 대단한 작곡가인 윤형주도 그 분에게 누가 될까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감히 조영남 따위가 건드리다니, 하는 암묵의 비난으로 느껴졌다.
일본 동해안 대지진참사가 있었고 한국의 KBS는 발 빠르게 일본의 이재민들을 위한 명목의 특집 콘서트를 열었다. 그 콘서트에서 조영남은 <서시>를 열창했다.
일제에 의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한 애통함이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있는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피로 토해낸 시들이다.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에 의해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분의 시를 일본 사람들에게 바치는 노래로 부르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려 있는 거지 박치기 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가볍다. 자유분방한 거랑 경박한 거랑 구별을 못 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 사회의 어른이 되면 말을 하더라도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아이와 다른 게 무어냐. 명예훼손으로 고소가 들어와도 나는 조영남을 비난해야겠다. 도대체 어떤 마인드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에서 윤동주는 수많은 번민과 고뇌를 했다. 그 부끄러움과 욕됨을 절절하게 쓴 시다. 이 시를 중학교 때 공부했었는데 윤 시인의 이런 심경에 대해선 일언도 없었다. 그저 먼 나라 이야기하듯 피상적인 것들만 듣고 공부했었다.
서울 청운동 언덕에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윤동주의 출생지인,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중국 용정엘 다녀와야 하지만 여의치 않다. 몹시 춥던 날 이곳엘 다녀왔다. 시인이 이 언덕에 자주 올라 경복궁과 자하문 일대를 내려다보며 망중한을 즐겼다고 해서 이곳에 ‘시인의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소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서시>와<별 헤는 밤>은 밤을 뒤척이게 했었다. 윤동주가 누군지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옛날 글 잘 쓰는 문학가이겠거니...
그토록 젊은 나이에 비운에 간 사람이란 걸 몰랐었다.
비통하고 안타깝다. 그 흔한 폐결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무지개 같은 앞날이 놓여 있던 꿈 많은 젊은이였다. 그래서 애통하다. 오로지 조국을 위한 일념 하나로 그 창창하던 날개가 꺾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 시비는 연세대에 있다.
핀슨 홀은 시인이 연전시절에 기숙사로 쓰던 건물이었다. 시비는 이 핀슨관 앞에 있다. 건물이 고풍스런 멋이 있다. 캠퍼스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돌아나왔다. 농구장에는 맹렬한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학생들이 반팔 차림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참말 젊음이란 세상 최고로 아름답구나.
저토록 펄펄 끓는 청춘의 그 나이에 윤동주는 수없는 날을 번민으로 괴로워하며 불꽃같은 시를 토해 냈다. 어찌 아프지 않은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인 그 화양연화의 나날들. 나는 20대에 무엇을 했나. 일말의 고민이라도 있었나.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을 안 받아주고 돌아서는 아픔 따위가 고작 나의 고민이었을까.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 . . . . . . . . . .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별 헤는 밤> 발췌
청와대길은 그 누구도 다닐 수 없다. 예전 노무현이 주인일 때는 도보여행카페에서 수없이 그 길을 지나다녔는데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이 들어가자마자 폐쇄했다. 삼엄한 살풍경이 오래도록 이 거리에 무쇠뚜껑처럼 짓누르고 있는 중이다.
윤동주 시 조영남 작곡 : 서시
노래는 좋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 제발 생각 좀 하고 부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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