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를 미리 정해두고 여정을 잡는 게 보통이지만 어느 땐 마땅히 갈 데가 없을 경우도 있다. 집에 있기 싫어 무조건 가방을 둘러메고 그냥 터미널로 간다. 가서 여러 행선지를 훑어보면 그중에 끌리는 데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선 여행이었다.
월악산행 버스를 탔다. 애초 등산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복장이고 신발이고 산행은 할 수 없다. 관광지니까 사람들 편히 다니는 데나 가벼운 산책할 수 있는 오솔길 정도나 돌아보면 만족이다. 겨울이니 월악산의 설경 사진 몇 장 찍고 올갱이해장국 한 그릇 먹고 오련다.
의외로 월악산행 배차 버스가 많다. 국립공원이니까. 첫차. 승객은 예닐곱 명.
서울을 벗어나 중부고속도로를 내달리면서 풍경이 달라진다. 들판에 허옇게 눈이 내렸다. 하, 멋진 풍경이다. 내가 차를 몰 땐 눈이 웬수더니 남의 차를 타면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날은 서울과 수도권에만 눈이 안 왔고 다른 지역은 대부분 눈이 내렸다고 한다.
일죽, 생극을 지나면서 하나 둘씩 내리고 용원에 도착하니 승객은 셋만 남았다. 기사가 버스를 세우더니 남은 세 사람에게 공지사항을 전한다. 눈이 내려 월악산은 운행이 안 된단다. 대신 여기서 다른 버스를 세워 다시 서울로 태워드릴 테니 어쩔 테냐고 의견을 묻는다. 월악산까지 가려는 사람은 나랑 오노 요꼬를 닮은 여자랑 두 사람뿐이었다. 눈이 그리 많이 내린 것도 아닌데 허탈하고 화도 좀 났지만 누구 잘못도 아니고 눈이 내려 위험하다는데 별 도리가 없다. 오히려 안전을 고려한 기사를 두둔해야 한다. 수안보까지는 운행한다 해서 나는 그럼 수안보까지 가겠다고 했다. 오노 요꼬를 닮은 여자도 수안보까지로 정한 모양이었다.
시간 죽이는 여행은 이래서 좋다. 굳이 목적지를 가지 않더라도 조바심 안 내고 여유가 있는 것이다. 어디든 내려서 걸어도 좋고 그냥 들판 방죽에 앉아 개개어도 좋다. 그럼 예정에도 없는 수안보 구경이나 좀 하자. 창밖은 하얀 눈이 덮인 들판이다.
수안보.
눈 내린 거리. 월악산을 가지 못한 나와 오노 요꼬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린다. 그 여자도 행장이 산행 차림은 아니다. 나처럼 가볍게 산책이나 하려던 요량이었을까. 나처럼 시간죽이는 나들이였을까. 일정이 달라졌으니 고스란히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돈다. 풍요해진 느낌이다. 같은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생각하기 나름이라 어떤 이에게는 그 하루가 질식할 듯이 빠듯하고, 나와 오노 요꼬는 긴 하루를 거저 얻은 셈이다.
어쨌든 눈 내린 설경이 아름답다. 같은 차를 타고 왔다는 동질감에 어색하지 않게 말마디를 주고받으며 수퍼 앞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뽑아 마신다. 차내에서는 오노 요꼬더니 모자를 쓴 여자는 메릴 스트립 같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다 마시는 그 시간까지는 나와 그녀는 동행인이었다. 어디로 갈 거냐고 그녀가 묻는다. 딱히 갈 데도 없어 그냥 요 근처 어슬렁거리다가 갈 생각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오노 요꼬는 버스 오는 대로 바로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공으로 생긴 시간이니 그냥 수안보까지 와 봤다고 한다. 솔직한 심정으론 나랑 같이 걷지 않을래요? 하고 싶었으나 낯선 여자에게 집적대는 인상이라도 줄까 싶어 그만두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눈에 덮인 거리를 걷는다.
난 가로수 풍경 찍는 것을 좋아한다.
수안보 터미널. 10년전 장기도보여행 때 이곳을 지났었다. 이 터미널에서 한 사람을 이별했다. 원래 예정된 이별이었지만 며칠 같이 지낸 인연이 정이 들어 얼마나 서운하고 허무했는지 모른다. 심성 약한 한 아가씨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 사람의 정이란 게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고약하구나. 그때 그 터미널이 지금은 폐쇄되어 거무칙칙한 건물이 흉물스럽다.
수안보지?
웬 괭이 한 마리가 내 작품을 버려 놓다니... 편집으로 잘라낼까 하다가...
충북 지방엘 가면 올갱이국이 맛있다. 구수하게 그거 한 그릇 먹고 서울로 되돌아간다.
서울에선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반디와 루니. 책이 아니라 커피를 먹으려고. 반디와루니 문고 내 테이크아웃 커피점. 전국 어디를 가서 먹어 봐도 이곳 커피가 가장 맛있는 것 같다. 물론 바리스타가 바뀌면 또 달라지겠지만. 난 반디와루니 회원이다. 회원에게는 20프로 할인 해 준다. 그런데도 비싸다. 그런데도 나는 기어코 이곳까지 와서 커피를 마신다.
간 김에 지도책을 하나 산다. 9년 전에 산 5만분의 1지도가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더구나 길이나 지도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최신 지도책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최첨단 디지털이 대세지만 나는 여전히 지도책을 본다. 그 안엔 또다른 세상이 있다.
새로 산 지도책에는 역시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와 지하철, 새로운 관광지들이 있다.
지금은 깊은 한겨울. 머지않아 또 계절은 바뀔 것이고 겨울이 가기 전에 나는 지도책 안의 어느 곳을 향해 걸어가야겠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최숙자 노래 : 수안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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