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가을 바람의 언덕, 추풍령

설리숲 2014. 12. 5. 00:56

 대전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배낭에 우산을 넣어 오지 않았다. 우산을 또 사야 하나. 여행길에 나서면 우산을 하나씩 버리고 오리라 했었는데 버리기는커녕 또 사야 될 처지가 되었다. 추풍령에 가는 길이다. 버스면 타면 비는 맞지 않을 테고 게다가 혹 추풍에 내리면 기상상황이 한결 나을지도 모를 일이라 어디 한 번 내 행운을 시험해보는 셈치고 우산 없이 그냥 버스에 올랐다. 배낭에 일회용 비옷은 있지만 그건 정말 비상시에 쓰는 거고 실상 이 정도 비는 맞아도 상관없다.

 

  김천행 버스는 추풍에 당도하기 전에 황간을 들렀다. 거기 내 여자친구가 산다. 보얀 창문 밖으로 그의 집 지붕이 보인다. 황간 차부에 정차하니 승객 절반 이상이 내린다. 그럴 일은 없지만 혹 그녀가 거기 어디 있을까 휘 둘러 본다. 낯익은 정경. 예전에 여러 번 와 본 곳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이곳서 내려 전화 한번 넣으면 신발도 안 신고 달려 나올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바쁜 사람이다. 알게 모르게 황간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예고 없이 전화를 해서 달려 나오게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내가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정겨운 풍경을 뒤로 하고 추풍에 내렸다. 비는 멈춘 건지 아예 안 내린 건지 허공은 물기 머금은 회색빛인데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비가 내리긴 할 모양이었다.

 

 

 

 

 

 

 

 

 

 

 추풍(秋風).

 가을바람.

 추풍령.

 가을 바람 언덕.

 남상규가 부른 <추풍령> 노래 작곡자는 이곳을 한번 와 보지도 않고 노랫말을 지은 게 분명하다. 구름도 자고 가는 구름도 쉬어가는... 하는 가사는 정말 이곳 실제와 영판 다르다. 말이 고개지 실제로는 평지나 다름없다. 해발 230미터라 하니 거의 고도가 없는 셈이다. 추풍령이란 이름만으로 막연히 높고 험한 고개려니 짐작만으로 지은 노랫말임이 드러난다. 영동 쪽에서 보면 평지요 김천 쪽에서 보면 야트막한 언덕 정도다. <가을 바람 언덕>이란 이름은 그래서 잘 어울린다. 언덕에 오르면 바람이 서늘하다고 한다.

 

 

 

 

 그저 평범하고 별 구경거리도 없는 그냥 소박한 농촌이다. 좀 특별하다면 이곳은 온통 포도농장이다. 영동은 이곳 뿐 아니라 전 지역이 포도와 감 세상이다. 영동읍은 가로수도 감나무다. 황간의 여자친구도 포도밭을 운영한다. 매해 봄철이면 문우들이 모여 하루 농활을 하곤 한다. 말이 농활이지 그저 얼굴이나 보고 막걸리 한잔으로 안부 확인하고 회포나 푸는 게 주 목적이겠다.

 여행객이 와도 특별히 둘러볼 것도 없고 그래서 머물러 갈 일도 없는, 노래만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알지 못 했을 추풍령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중요한 사적 기록들이 몇 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신을 하려면 워낙 거리가 멀어 이곳에서 머물거나 숙박을 하곤 해서 그 편의를 위해 우체국이 생겨났다. 추풍령우체국은 우리나라 우체국 1호라고 한다.

또한 지정학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기상 관련 기관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이곳의 기상관측소 역시 우리나라 1호라고 한다.

   

                 추풍령우체국

 

 

                          추풍령기상대

 

 

 

 

 

 추풍령역.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다. 경부선 철도가 영을 넘고 경북고속도로가 또 영을 넘는다. 유명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뒷얘기에 의하면 원래 경부선 철도는 이화령을 넘는 코스로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화령은 너무 높아 부설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 다각도로 조사해 본 결과 가장 낮은 이곳 추풍령으로 계획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는.

 처음엔 증기기관차였다. 당연 기차 운행에 물이 필요했다. 경부선 철도엔 9개의 급수탑이 설치되었다. 이곳 추풍령역 급수탑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등록문화재 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풍령 급수탑

 

 

 

 기어이 비가 내렸다. 추풍령 저수지를 돌아보려고 발걸음을 시작하는데 빗방울이 굵어졌다. 포기한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대전으로 돌아가려고 차부에 와 시간을 보니 10분전에 버스가 이미 떠났고 다음 차는 2시간 후다. 시간죽이기에 들어갔다. 우선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 하나. 그리고 약속다방에 들어갔다. 원래 다방엘 가는 성향은 아니지만 버스시간은 멀고 비는 오고 다방이 만만했다. 참 오랜만에 들러보는 다방.

한산하고 여유로운 특유의 시골다방 분위기. 내가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이 지나도 가질 않자 아주머닌지 아가씬지 와 앉으면서 반가워하는 척 한다. 별 시덥지도 않은 대화 몇 개 오가고 나서 그런다. 아저씨 지금 패션 스타일이 좋으네요. 그래요? 그따위 립서비스를 한다고 내가 쌍화차 한잔 대접해 줄까보냐. 하긴 내 스타일이 그날은 좀 괜찮긴 했다. 근데 모자 하나 쓰셨으면 패션의 완성인데 한 10프로 모자르네요. 아... 그래 모자... 실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모자를 두고 내렸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있는 일이다. 아까운 모자를 벌써 몇 개를 잃어 버렸나.

 

 

 

 

 

고갯마루다. 고개라는 말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든 고개는 고개. 이곳에 떨어지는 비는 이산가족이 된다.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금강이 된다. 운명은 참 기묘한 것이다.

 

 

 

추풍령 기상관측소 정원에서 찍은 낙엽. 비를 맞은 낙엽이 애달프다. 겨울바람이 불면 어디로들 다 갈 것이다.

말 그대로 ‘추풍낙엽’이다. 추풍이란 이름으로 하여 생긴 이야기 하나.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은 추풍낙엽이란 사위스런 말 때문에 추풍령을 넘지 않고 인근 괘방령을 넘어갔다고 한다.

 

 

 

 

버스에 오르자 비는 잦아졌다. 대전으로 오는 내내 창밖은 11월의 자욱한 풍경이었다. 아 멀리 가 버릴 시간들이여.

낙엽. 전설. 그리고 애달픔.

안녕, 내가 간직하지 못한 추억들과 잊혔던 그 날들, 사람들.

 

 

 

 

                                     전범성 작사 백영호 작곡 남상규 노래 : 추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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