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적 비엔나에 살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도 요직 이곳저곳에 앉아서 영화를 누리는 유태인들을 보며 조금씩 시기와 질투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능력을 과시했다.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저질러도 요직에 앉아 주무르는 그들의 힘 앞에 감히 대적할 세력이 없었다. 히틀러는 그때부터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가졌다고 한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저 놈들 몰살시키리라. 어렸을 적 품었던 미술학도의 꿈을 버리고 그는 독일로 건너가 군인이 되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이런 히틀러에게 영향을 준 인물 중의 하나다. 청운의 꿈을 안고 작곡가 마이어베어를 찾아간 젊은 음악도 바그너는 그러나 냉정하게 거절당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 마이어베어는 유태인이었는데 이로 인해 바그너는 엉뚱하게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혁명에 가담했다는 죄명으로 수배자가 되었을 때 스위스로 망명을 했다. 취리히의 한 상인의 집에 신세를 지며 머물다가 그의 아내와 통정을 했다. 관계가 남편에게 발각되어 죽을 처지에 놓였다가 가까스로 벗어나 사랑을 나누던 상인의 아내를 포기하고 도망쳐 나왔다. 그 상인도 유태인이었다. 바그너는 반감을 넘어 유태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후로 그는 평생 반유태주의와 독일인의 우수성에 대한 기본신념을 안고 산다. 그의 음악들은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게르만민족의 신화와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철저한 게르마니즘의 발로다.
이러한 바그너의 음악을 히틀러는 자신의 편집증적 욕구충족으로 이용하게 된다. 나치 집회에선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을 연주했고 가두행진 때에는 <순례자의 합창>을 연주했다. 또한 <지그프리드 목가>는 제2의 당가(黨歌)였다.
저 유명한 홀로코스트 대학살 때 히틀러는 <순례자의 합창>을 틀어 놓고 사디즘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1979년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은 평화롭던 베트남의 한 마을을 폭격하면서 심리전이라며 확성기 볼륨을 크게 올려 음악을 틀어 놓는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다. 인간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광기와 처참한 살육의 미장센이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은 이 장면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히틀러의 광기와 전쟁광 미국을 동일시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파괴하는 군상들을 비판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바그너는 위대한 음악가다. 그러나 지녔던 강력한 철학으로 인해 그에 대한 평가는 음악에 미치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죽어가면서 유태인들이 마지막으로 듣던 것은 바그너의 음악 <순례자의 합창>이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그너는 후세의 히틀러의 동조자로 낙인찍혔다. 어찌 보면 그도 한 미치광이에 의한 희생자인 셈이다.
나의 삶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리하르트 바그너 가극 <탄호이저> 중, 순례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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