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미국을 싫어하지만 ‘홍하의 골짜기’, ‘콜로라도의 달’ 등 미국 민요들이 참 좋다. 미국이라는 정체와 음악 등 예술과는 별개일까.
친일인사인 서정주, 그리고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또한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홍난파를 찾아 수원엘 다녀왔다. 난파는 경기도 화성 출신이다. 그런데 진즉부터 수원이 ‘우리 지역 문화인물’로 선점했던 것이다. 홍난파를 프랜차이즈 인물로 선정하고 관련행정을 벌이려는 화성시 측이 당연 반발하며 이같은 수원의 행태를 성토하고 있다. 당장 그만두고 난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목하 압박하고 있는 걸로 안다. 나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 별 관심은 없다. 수원 홍난파 동상
수원시청 건너편 올림픽공원에 홍난파의 동상이 있으며 팔달산에는 홍난파노래비가 있다.
수원 홍난파노래비 한 남자가 노래비에 빵과 막걸리 음료수를 놓고 잠시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 사당도 아니고 묘지도 아닌 노래비 앞에서 묵념을 한다는 건 좀 특별한 정경이다. 홍난파와 어떤 내밀한 내력이 있을 것 같아 몹시 궁금했지만 그냥 말았다
그리고 서울 홍파동으로 갔다. 홍파동에는 난파가 말년 여섯 해를 살았던 집이 있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보존 가치가 있는 집이다. 그곳에서 문화해설사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친일행적이 먼저 거론되었다. 해설사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을 초들어 적은 과오 때문에 큰 업적이 폄훼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해 주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 창문 밖으로 인왕산이 큼지막하게 내다보였다 하는데 지금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가득 가로막고 있어 답답한 느낌이다. 그 건물들도 낡고 오래 것들이라 주위 풍광은 좀 너저분하다고 할까.
벽에 난파가 작곡한 노래가 동요 가곡 별로 나열되어 있는 게시물이 있어 훑어보니 대개 우리가 예전부터 불러 왔던 주옥같은 곡들이 망라되어 있다. 우리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가곡들을 보니 몇 곡을 빼놓고는 거의 전부 이은상의 시로 만든 노래였다. 이은상 역시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 아니던가. 묘한 매치다. 머릿속은 더욱더 어지러워졌다.
아직은 모르겠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이라야 정당한 평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그의 아름다운 음악들을 듣고 부르련다. 친일 인사라 해서 그의 음악들을 도외시한다면 개인적으로 잃는 것이 너무 커 보인다. 미국을 싫어하지만 그 나라의 민요들을 좋아하듯 그렇게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한다. 어쨌든 이같은 논란 여파로 2000년대 이후 교과서에 ‘고향의 봄’은 더 이상 실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작년(2013) 46회 난파음악상으로 선정됐던 작곡가 류재준은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SNS에 이렇게 썼다. “난파음악상을 수상거부 했습니다. 지금부터 나오는 기사는 제 의사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정확한 수상 거부 이유는 친일파 음악인 이름으로 받기도 싫을 뿐더러 이제껏 수상했던 분들 중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상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회의를 느껴 거부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그를 친일파로 몰아대는 사람들 일부는 노래 <봉선화>를 표절곡이라고 폄훼하고 있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콘체르탄테 2악장 K.364>을 들어보면 처음 8마디가 비슷하긴 하다. 그런데 비슷하긴 하지만 같지는 않다. 표절로 평가절하하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봉선화는 가곡이지만 가장 먼저 부른 김천애의 노래처럼 인식되고 있다. 가장 먼저 취입을 했고 수많은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 봉선화
- - - - - - - - - - - - - - - - - - - - -
홍난파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의 가장 큰 산맥일 정도로 그가 우리 음악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전공은 바이올린이었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 음악평론가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출판사업가와 작가로서 여러 단편을 발표한, 말 그대로 만능 음악가였다. 그만큼 양악의 모든 분야에 우뚝 솟은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 양악사는 처음 시작하는 때나 다름없어서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활동 이면에는 반민족적인 친일활동도 있었다.
◈초기 활동
우리가 머릿속에 홍난파를 떠올릴라치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집히는 것이 있다. 어린이나 어른 공히 부르고 있는 <고향의 봄>이라든지, 우리네 누님들이 서럽게 부르며 길게 늘어뜨린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하는 <봉선화> 등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더욱이 ‘봉선화’는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일제 아래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음악 선생님에게 배운 바 있는 우리에게, 홍난파는 '민족적 수절을 지킨 음악가'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1942년 2월, 일본 도쿄에 있는 무사시노 음악학교(1929년 설립, 1949년부터 음악대학으로 직제개편)를 졸업한 소프라노 김천애가 같은 해 4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일본신인음악회에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열창함으로써 열렬한 환호와 벅찬 눈물로 감동을 가져온 바도 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김천애는 귀국 활동을 통하여 ‘봉선화’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더욱이 1943년 경성후생실내악단 단원이었던 김천애가 경상남도 삼천포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계획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이 노래가 '금지된 노래'로 처분됨에 따라 '봉선화=홍난파=민족음악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변절
하지만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돼버린 민족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 그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가 3·1 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에 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즉, 민족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1937년 7월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펼쳐져 왔던 그의 '민족음악개량 운동'이 '친일음악 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모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나는 '민족음악개량 운동'이 애초부터 식민지 하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수양동우회' 사건(수양동우회는 흥사단 애국계몽단체였지만 안창호가 죽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변절했고 그래서 기소된 사람들도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 모임의 재산은 모두 국방헌금으로 냈다고 한다)이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매우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에 싸여 있지만 서양의 음악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쾌하고 장중하다"(‘동서양 음악의 비교’, 1936) 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음악을 비판하고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의 '민족음악개량 운동'은 조선음악의 역사인식이나 미학에 관하여 무지한 데서 비롯하였다.
또한 이러한 서양음악 계몽운동이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아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에도 그의 '민족음악개량 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쉽게 친일의 길을 걸어간다.
◈홍난파의 친일활동
홍난파는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여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 회원으로 가입한다. 조선문예회는 작가들과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함화진, 현제명 등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친일단체였다.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 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홍난파는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凱歌)’에다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년 9월 30일에는 조선문예회가 신작발표회로서 '황군위문조성 - 총후반도의 애국가요' 발표회 겸 '시국가요 피로의 밤'을 부민관 대강당에서 가질 때, 그는 ‘장성(長城)의 파수’(최남선 작사)와 ‘공군의 노래’(空軍の歌: 彩本長夫 작사)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 1937년 10월 3일에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대연주회에 출연하였다.
그는 1938년 7월 9일에 경성방송국 제2방송 '동요와 합창' 시간(오후 6시)에 경성방송관현악단의 반주와 경보(京保)합창대·경성보육학교생도합창대(지휘 이흥렬)의 노래를 지휘하여 친일가요를 방송하였다. 이때의 노래들 중 중일전쟁(1937. 7. 7)의 산물로 나온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에 의해 작곡된 노래로서,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인데,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 작품이고, 더욱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1939년 10월 5일 9시부터는 경성방송국 제1방송을 통하여 홍난파가 지휘하는 경성방송관현악단 공연이 방송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애국가곡집'이었는데, 이때의 '애국'은 '일본천황국가에 대한 애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곡목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황국정신을 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の歌),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이 그것이었다.
이 노래들이 반민족적인 노래들이고 이 노래들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친일음악 행위라는 것은, 그 노래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바꿔 놓으려는 것이며, 결국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합의해 온 바 있는 민족정신과 민족정서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난파는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일가요와 글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연대 미상이지만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한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지나사변과 음악’은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희망의 아침’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펴낸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한 노래로, 가사는 지금은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는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가사에서 "일어나거라 우리 임금의 분부" 받아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대아시아 대공영권"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복 누릴 국토"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천황폐하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일본정신, 곧 황국정신의 구현이었다.
음악 특징으로는 전형적인 일본 민족음계인 '도레미솔라'라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역시 일본 음악의 특징인 2박자 계통으로 작곡되었다. 따라서 홍난파가 1930년대 벽두부터 주장한 순수음악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던 자기도피와 자기를 기만하는 음악운동이었다. 그가 조선 양악계의 대부라는 점에서도 그의 두 마음과 두 정서는 일본 마음과 일본 정서가 중심이었다. 한편,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글에서 그는 더욱 분명하게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성전(聖戰)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新東亞) 건설의 대업(大業)이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때에 후방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했던 악인(樂人)들의 뇌리에는 용용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감흥이 감발(感發)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날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음악보국운동에 매진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면 홍난파는 이미 제국주의를 펼치고 있는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어 있었다. '음악 일본'이 하루라도 빨리 본 궤도에 올라 서 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음악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1940년 9월 1일자 ‘매일신보’에서 창씨개명한 이름 모리가와 준(森川潤)을 사용하고 있는데, 창씨개명한 이름조차 성도 이름도 완전하게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1941년 1월 25일에는 '악단을 통하여 직업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고 신체제운동을 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의 23명의 평의원 가운데 7명밖에 안 되는 조선음악인 평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41년 홍난파는 악화된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뉘우치고 한탄해야 할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난파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민족현실 없는 순수음악운동이 왜 식민지하에서 거짓이며 죽음인지를 드러내고, 우리가 그를 통하여 기대했던 희망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서늘한 숲 > 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레는 시간 속을 걷다, 정선 (0) | 2014.07.24 |
---|---|
무교동 이야기 (0) | 2014.07.21 |
고모령 (0) | 2014.07.14 |
마포 종점 (0) | 2014.07.02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운두령 (0) | 2014.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