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어 건들바람이 불고 추석도 지나고 나면 헛간에서 화로를 꺼냈다. 우리 지방에서는 ‘화리’였다.
겨울 추위가 워낙 혹독한 강원도 산골에서 화리는 가장 요긴한 가재였다. 전문가가 지은 것도 아닌 손수 지은 초가들이야 집 모양만 갖추었지 허술하기 짝이 없어 매운 겨울바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저녁답에 아궁이에 불을 때면 난방과 더불어 밥을 지었다. 활활거리던 불꽃이 일단 사그라지면 새빨간 잉걸을 화리에 담아 방안에 들여놓는다. 비로소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이튿날 아침까지 화릿불은 엄동설한의 밤을 지켜주는 것이다.
화리는 난방 말고도 화덕이나 오븐 또는 렌지 역할을 했다. 구멍쇠를 얹어 국이나 찌개를 끓이거나 데웠고 소댕을 얹어 저냐도 부치고 적도 부쳤다. 불시울 속에 밤이나 고구마를 파묻어 긴 겨울밤 간식거리를 익히기도 하였다.
또 석쇠를 얹어서는 김을 굽고 고등어 양미리를 구웠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엄마는 가끔 양은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하나를 깨어 지져서는 아버지를 주곤 했다. 아이들은 안주고 아버지만 먹는 그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맨날 저거만 실컷 지져 먹으리라 다짐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는 잘 안 먹게 되고 또 옛날처럼 맛이 있지도 않았다. 달걀 하나도 아이들에게 풍성하게 먹이지 못하는 궁색한 애옥살이였다.
가을들녘에서 잡아온 메뚜기를 구워먹었고 꽁꽁 언 얼음을 깨고 잡아온 개구리도 구워먹었다. 참말 개구리는 구워먹는 게 가장 일품이었다. 때로 참새 따위 작은 새들이 지글지글 화리에서 익기도 했다.
화리에는 항상 인두를 꽂아 두었다. 부젓가락을 둘 때도 있었다. 인두는 가금 불시울을 뒤적거리는데 쓰였고 새로 빤 저고리 깃 등 옷감을 다릴 때 요긴하게 쓰였다.
춥다고 불을 헤집어놓으면 엄마는 불 아끼라고 지청구를 주었다. 딱딱하게 굳은 가래떡을 하나 가져다가 뜨거운 인두에 죽 그으면 더껑이처럼 허옇게 일어나 아이들은 먹는 것 보다도 그게 재밌어 엄마한테 군소리를 듣곤 했다.
또한 화리에 다가앉아 덜 마른 빨래를 말리기도 했다. 그럴 때 뽀얗게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을 더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빨래를 말리면서 가끔은 딴짓을 하다가 누렇게 태우기도 했다. 더구나 나일론은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오그라들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형수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한겨울이어서 기저귀를 빨고 말리는 게 일이었는데 시렁 아래 주욱 기저귀를 널어놓고 가까이 화리를 놓아 두어 수월하게 말릴 수 있었다.
내복을 벗어 솔기를 헤집으면 이들이 숨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잠자기 전까지 딱히 할 일도 없어 솔기를 톺아 이를 잡아냈다. 잡아 낸 이는 손톱으로 눌러 죽이기도 했지만 화롯불에 던져 넣었다. 찰라지만 틱, 하고 타 죽는 순간은 희열을 느꼈다. 매일 잡고 잡아도 내복에는 늘 이가 꾀었다. 내복을 화롯불에다 쬐고 있으면 뜨거워져서 놈들이 솔기 밖으로 기어나오곤 했다. 그 진절머리나는 이의 기억들. 화롯가에 다가앉아 이를 잡던 까닭없이 정겨운 풍경들.
아침에 일어나면 작은 불씨도 다 꺼지고 화리는 재만 남아 있었다. 재를 버리는 건 아버지가 주로 하였다. 버리는 게 아니라 모아 두었다. 아궁이나 화리의 재는 뒷간에다 모아 두었다. 똥을 누고는 재를 덮어 나무가래로 뒤쪽으로 밀어 치워놓는다. 그렇게 재에 버무린 똥은 발효가 돼서 아주 질 좋은 거름이 되는 것이다.
겨울의 상징은 역시 질화로다. 질화로는 또 고향의 상징이다. 난롯가에서 문학이 생성됐거니와 우리 고향의 화롯가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인생과 문학으로 얽혀 퍼져나갔다.
문명이 발달한 지금 화로만큼 다양한 기능을 가진 기구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