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작사 작곡 박은옥 노래 : 정동진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내처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깨어 있어 봐야 차창 밖은 짙은 어둠뿐이라. 대간을 넘으면서 서서히 잠이 깼다. 애매한 계절이다. 가을이라 하지도 겨울이라 하지도 못하게 어정쩡한 시간이다. 창밖은 동해바다임이 짐작되지만 여전히 세상은 칠흑이다. 여름이라면 부옇게 새날이 밝을 시간이다. 이렇게 밤이 깊으니 분명 가을을 넘어 겨울임이 확실하다. 더구나 저녁부터 냉랭하게 추워지면서 기상청은 영하로 떨어진다고 했다. 그럼 겨울이다.
내가 왜 정동진에서 내렸을까. 새벽 4시 28분.
정동진에 도착하자 거의 모든 승객들이 다 내렸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종의 군중심리에 빠졌나 보다. 원래 강릉역까지 갈 요량이었지만 약속 시간이 10시라 그 시간에 강릉역에 내려도 시간 죽이기가 마땅치 않을 것이었다. 차라리 정동진에 내려 다른 사람들처럼 해돋이나 기다리는 게 시간 보내기에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루루 내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즉흥적으로 판단을 했다.
플랫홈에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냉기. 한겨울에 들어선 느낌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가 요란하다. 일출시간은 7시라고 플랫홈 한귀퉁이에 팻말이 서있다. 2시간 반이나 이 추위를 견디고 기다려야 했다.
“아가씨들 방 잡고 쉬었다 가요”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아가씨들한테 쉬었다 가라니. 사내들이라면 귀에 익숙한 저 호객행위. 사창가에서나 있을 법한 그것. 쉬었다 가세요.
개찰구를 지나 역사를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늙수그레한 노파 몇이 저마다의 손님을 잡으려고 진대붙는다. 해 뜨는 시간이 머니 방을 잡고 따뜻하게 기다리라는 호객이다. 내용이야 다르지만 그 소리가 몹시 경멸스럽다.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내내 가는 곳마다 쉬었다 가라며 다가서는 노파들. 짜증나는 풍경들이다.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밤기차를 운행하는 건 순전히 해돋이 승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계절에 따라 탄력적으로 시간을 조정하면 좋지 않을까. 여름이라면 이 시간에 도착해도 상관없지만 가을 지나 겨울이면 해돋이시간이 한참 늦어지니 한밤중에 가까운 시간에 내려 기다리는 건 괴로운 일이다. 가장 추운 새벽시간이다.
아, 어쩌면 그걸 노리는 운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역경제에 보탬을 주려는. 시간을 죽이자면 뭐든 해야겠지. 깜깜한 밤에 산책을 할 수도 없으니 해장국집에 들어가 소주라도 하거나 커피집에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그래서인지 새벽에도 문을 연 커피하우스들이 있다) 그것도 아니면 그 노파들을 따라가 여관방에 들게 하여 주머니돈을 알겨먹게 하려는 술수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날은 몹시도 추웠다. 다들 다운점퍼 따위 두꺼운 외투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의 위력이 대단했다.
나는 다 고사하고 어디 피시방엘 가려고 샅샅이 뒤졌지만 한 집도 없었다. 온몸을 휘감는 냉기에 강릉까지 가지 않고 정동진에 내린 걸 후회했다. 강릉시내로 갔더라면 피시방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건데.
커피를 마시든 해장국을 먹든 2시간 반을 버티기엔 주인한테 눈치도 보이는 노릇이다. 그저 무작정 길을 걸었다. 속도를 좀 빨리했더니 냉기가 좀 가시는듯하다. 바람은 몹시 세다.
비로소 하늘의 별을 본다. 산 위에 올라앉은 거대한 배 크루즈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먼 바다로 고기잡이 나가 있을 가난한 어부들을 생각한다. 바람 거센 이 밤에도 나갔을까. 똑같이 맞는 새벽을 어느 누구는 생의를 위해 거친 바닷바람과 싸우고 어느 누구는 해돋이를 보겠다고 몰려오고. 늘상 가지는 의문이다. 왜 세상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지 않을까.
여명이 찾아왔다. 시간은 어김이 없어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서서히 물러갔다. 거센 바람에 드높은 물너울과 거친 파도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 훤하게 보였다. 광명.
그날 하루 종일 파고는 높고 바람은 매정했다. 길고 깊은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모래시계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조용히 침잠하여 다가오는 날들의 꿈을 꾸어야 할 때임을 실감한다.
도처에 기쁨과 슬픔, 밝음과 어둠은 상존한다.
영원하지 않은 사랑.
가슴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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