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어머니의 유품 하나가 있다. 낡은 주전자.
당시에는 그리 낡은 게 아니었을 테지만 제법 시간이 흐르는 동안 때가 덕지덕지 절어붙고 손잡이 부분은 거의 녹아 버려 아주 볼품이 없어졌다. 크지도 않은 이것은 쓸모도 없어 용도는 단 하나 커피 물 끓이는 데만 쓰인다. 빠른 전기포트도 있건만 커피를 마실 때는 꼭 이 낡은 주전자를 쓴다. 그냥 예전부터 해오던 낡은 습성 같은 것일 게다. 굳이 의미를 하나 더 붙이자면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이 죽어 상여가 떠나게 되면 옷가지 등 그 사람이 쓰던 것을 죄다 태우는 걸 보곤 해서 나름의 의문을 품기도 했었다. 왜 고인의 정든 물건을 다 태워 없애지. 누나의 말로는 죽은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건 없애야 하는 거야. 그래야 그 사람이 뒤돌아보지 않고 영원의 길로 편안히 가는 거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대충의 의문은 푼 셈이었으나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졌다. 사랑하던 사람의 체취가 남은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오래도록 그 사람의 영혼과 함께 있다는 훈훈함 같은 것. 죽은 그 사람이 생각난다고 그리 뼈에 사무치도록 고통스럽지는 않을 터. 슬픔이야 당장이지 그 이후로는 그저 무덤덤해지기 마련이다.
한때 일심으로 사랑했던 연인이 남겨 준 유품도 많다. 헤어지고 나서 그것들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응은 없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계속해서 썼고 필요하지 않은 건 어디엔가 넣어두었다. 그걸 본다고 해서 떠나간 연인이 사무치게 그립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내게 남겨 준 것들이 곳곳에 참 많기도 했다. 속옷에서부터 액세서리 인형 따위 소품들까지, 하다못해 내 집에 두고 간 슬리퍼 우산도 있다. 한동안은 맞지도 않은 그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 그것도 어느 때부턴 관두고 신발장 어느 구석에 넣어 두고는 뽀얗게 먼지를 앉혔다. 우산은 어디다가 잃어버리고.
어렸을 때 제일 무섭고 고통스러운 게 엄마가 죽는 것이었다. 죽음이 가장 무서운데다가 세월이 흐르면 우리 엄마도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오줌 지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는지. 성인이 되면서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서서히 변해 가고 엄마의 죽음이 여전히 싫기는 했지만 아이 때의 공포는 차츰 엷어져 갔다. 부모가 싫어서 패륜을 저지르는 사례도 있고 부모가 너무 오래 살면 아들며느리가 참 힘들겠다는 현실적인 사려도 생겼다. 그래서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가게 돼 있구나. 때가 되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픔은 있으나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그닥 두렵지는 않은 것이다.
대신 새로 맞는 두려움은 내 연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상상이었다. 정말 생각하기 싫은 두려움이다. 연인과의 이별은 그래서 아픈 것이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가지기 위한 예비단계이기도 하다. 그것이 참으로 슬프고 괴롭다. 한데 가증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 또 엷어지는 게 그것의 특성이다. 오히려 내가 그것을 박차고 다른 상대를 만나거나 결혼을 하는 수도 있으니까. 함께 웃도 뒹굴던 날들의 절절했던 사랑도 유행가 노랫말처럼 시간이 해결해준다. 남녀간의 사랑은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유품은 반드시 오래 간직하고 싶지만 애인이 남겨두고 간 유품은 그런 절박함이 없다. 단지 어느 날 그가 결혼했다는 풍문을 들으면 이건 버려야지 저건 아까운데 그냥 갖고 있자 뭐 이런 정도의 밋밋한 고민은 할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게으른 사람은 생각만으로 그치겠지만.
내 웃는 모습은 참 보기 싫다 이빨도 못 생겼고... 다른 사람은 보기 좋다 한다.
어쨌든 이 사진 참 잘 찍었다 잘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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