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할미꽃도 꽃일랑가

설리숲 2012. 9. 18. 22:46

 고 박완서 선생의 단편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이 있다. 페미니즘 소설이라 분류돼 있지만 실상은 그보다는 모성애적인 휴머니즘이 농후하다. 군대 혹은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성에 대한 본질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은 보편적인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 지배하고 있다. 더구나 남자, 즉 수컷들만 모아 놓은 집단에서의 성(性)과 그에 대한 담론은 처절하면서 애절하다. 수많은 에피소드가 나오고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곤 한다. 그럴 것이 가장 혈기왕성한 남성들의 억압된 통제집단이니 흔한 말로 군대에서는 할머니도 예뻐 보인다고 한다. 박완서의 소설도 그런 모티프를 기조로 깔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여자 구경하기가 힘들었던 옛날 얘기지 요즘 군대야 완전 다른 세상이 되었다. 여성에 대한 갈급은 거의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전에 정미 씨가 해준 할미꽃 이야기에 폭소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짠했었다.

 

 어느 병사 둘이 외박을 나왔다. 젊은 남자들이라 늘 성이 간절하다. 군바리 세계에서 외박은 곧 여자와의 그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은 어영부영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다가 때가 되어 여자가 있는 인근 술집으로 갔다. 게서 정신머리가 아뜩해지도록 술을 푸고 어찌어찌 서로 헤어지고 어찌어찌 여자를 따라 갔단다. 어찌어찌 회포의 밤을 보내고 곤죽이 되어 쓰러져 자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옆에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이건 다 늙은 할망구가 아닌가.

 병사는 공중바람으로 일어났다. 하도 쪽팔리고 민망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내튀는데 그 등뒤로 애정이 담뿍 담긴 할망구의 쉰 목소리가 따라왔다.

 

 젊은이~ 복 받을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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