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워낭소리

설리숲 2012. 1. 13. 23:05

 

 처녀는 사뭇 기분이 들떠 보였다. 그까짓 영화야 버스 몇 구간 타고 가면 최첨단의 CGV 영화관에서 최신작을 골라 보고, 1층 카페베네에서 우아하게 앉아 커피한잔 마시고 쇼윈도 안의 신상품들을 눈요기해 가면서 근사하게 하루 시간 보내면 될 일이고 그런 일은 평상 해 오던 일이지마는.

 이곳에 온 이후로는 문화생활이라는 게 기껏해야 밤에 잠깐 들여다보는 드라마가 고작이요 보이느니 맨 산자락이고 맨 찻잎뿐이다. 뻔질나게 문자는 들어와 친구년들은 오늘 어딜 갔네 뭘 먹었네 하면서 보고 내지는 자랑질을 해대곤 한다. 저도 집에 있으면 그런 거야 생활이지만 이놈의 시골 생활은 정말 무료하기 짝이없다.

 그런데 아까 저녁나절에 이장님 방송하길 저녁에 마을회관에서 ‘워낭소리’를 상영한다 하니 주민들 많은 참석 바란다는 귀가 솔깃한 소리를 들었다. 처녀는 청년한테 이 소식을 전하고 저녁에 꼭 보러 나가자고 다짐을 받는다. 그리고는 사뭇 생각이 거기에 미쳐 일도 건성건성 손에 안 잡히고 내내 그 이야기만 했다. 오죽하면 진득한 청년이 짜증이 다 날 정도다. 께지락대는 일도 왜 그리 하기 싫은지 어여 어둠이 내렸으면 좋겠는데 짧은 봄날 오후는 어찌 그리 더디 가는지.

 처녀는 스스로 민망하다. 그래도 어엿한 도시여자인데 ‘워낭소리’ 하나에 이렇듯 신경이 쏠리는 게 아무래도 겸연쩍다.

 

 

 

 저녁 먹을 때 처녀와 청년은 결국 한바탕 눈을 부라렸다. 처녀도 그렇고 청년도 도시 사람이다. 차를 만들어 보겠다고 청년이 먼저 이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일하다가 나중에 처녀까지도 불러들여 같이 지내게 되었다. 둘은 연인이고 처녀가 두 살이 위였다. 연상의 여자지만 우리가 보기에 늘 처녀가 어리광과 투정을 부리는 쪽이고 나이 어린 청년이 진득하게 다 받아주고 토닥여주는 모양새였다. 일하는 것 말고는 재밋거리도 없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처녀는 점점 심심해했고 그때마다 청년에게 심심풀이를 요구하며 짜증도 부려댔다.

 그날 저녁에는 내내 워낭소리를 들먹거리며 청년을 보채다가 참다못한 청년이 싫은 소리를 했나 보다. 팩 토라져서는 연극 주인공처럼 방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한심해 죽겠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게 승질 난단 말이다. 그깐 워낭소리 때문에 이렇게 징징대는 내가 웃긴다. 그치만 그냥 기분 좋게 응응 해주고 넘어가면 될걸 꼭 그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니? 내가 워낭소리 못 봐서 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요즘 생활이 짜증나서 미치겠어서 그러는 걸.”

 그렇지. 워낭소리가 보고 싶어 그러겠나.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이 지겨우니 잠시 그런 거로라도 기분을 풀고 싶은 거지.

 그렇게 투덕거리다가 금방 화해는 했는지 식사 후엔 또 해해거리면서 마을회관 갈 생각에 얼굴이 또 폈다.

 

 

 

 어둠이 깔리고 마을 여기저기 보안등이 켜지면서 둘은 날마다 산책하는 그 모양새로 손을 잡고 올라갔다. 우리 중의 다른 사람 두엇도 사라졌는데 아마 거기로 갔을 거라 짐작했다.

 나는 영화 따위는 아예 생각이 없어 초저녁부터 책을 펴고 앉았다. 그랬는데 마을회관 갔을 거라 짐작했던 사람이 들어왔다. 헛걸음 했다는 것이다. 마을회관에 올라갔더니 마을사람들도 여러 명 와서 웅성거리는데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고 더구나 영화를 상영해야 할 낯선 사람 그림자도 없다는 것이다. 낮에 방송을 했던 이장님이 고개 갸웃거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 대더니 시르죽은 얼굴을 하고서는 자기가 잘못 알았다고 영화 안 한단다고 다들 맥 빠지게 돌아왔다고 한다. 아마 행사측의 착오거나 이장이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며 이장이 얼마나 미안하고 쪽팔려 하던지 그게 영화보다 더 재밌더라고.

 

 

 

 오카리나를 불려고 개울가로 나갔다가 슬그머니 돌아오고 말았다. 물소리와 함께 여인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잦아든 울음밑을 미루어 아마 제법 섧게 울었던 것 같다. 두런두런 청년의 속삭이는 소리도 들린다. 애인을 달래려고 또 얼마나 노심초사 애를 먹었을까. 나이를 먹어도 여자는 여자고 또 남자는 남자다. 여자들이 남편을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라고 하지만 두 사람을 보면 여자가 너무 여리고 소견머리가 없어 보인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가녀린 심성의 처녀다. 그 기분 충분히 안다. 엄연히 도시에서 마음껏 호사를 즐기면서 지내다가, 또 얼마 안 있어 이곳 일이 끝나면 다시 그곳으로 나가 그것들을 즐길 거지만, 환경은 저토록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놓는다. 그까짓 워낭소리가 뭣이관대 아름다운 도시처녀를 섧게 섧게 울게 할까. 가까운 숲정이에서 두견이도 따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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