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봄 한철 소묘

설리숲 2011. 11. 9. 05:34

 

 

 억수같이 비가 내린다. 오줌이 마렵다.

 잠이 깬다. 한밤중이다. 처음으로 고기를 먹은 밤이다. 귀하게 먹은 오리고기라 너무 허겁지겁 집어넣었나보다. 몹시 갈증이 난다. 요란하게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때문일까 오줌이 마려서일까 갈증 때문일까 잠이 깬 것이. 그러고는 도시 잠이 오질 않는다. 비를 뚫고 홀로 차방에 가 앉는다.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혼자 깨어 있다는 사실은 묘한 쾌감을 준다. 차를 우려 마신다. 홀로 우아하게 고상한 명상을 하고 싶었으나 퍼붓는 빗소리가 신경을 앗아 간다.

 유난히 봄비가 잦은 해다.

 

 

 

 늦게까지 추운 겨울이 이어졌다. 이젠 더 이상 기상이변은 아닌 것 같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면 이게 정상이 아닐까.

 몹시도 혹독했던 겨울. 세상을 혹한의 세계로 몰아넣었던 그 계절에 식물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 차나무가 죄다 동사해 버렸다. 봄이면 싱그럽게 초록을 올려 보는 눈이 새초롬해지게 하더니 차밭이 온통 검붉은 세상이다. 마치 강력한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들판을 보는 듯 했다.

 그렇다고 세상이 망하지는 않았으니 그 와중에도 잎을 피우는 놈들은 있어 사람들은 또 거기 달라붙어 나도 여기 살아 남았소 안부를 주고받으며 일상을 이어나간다.

 

 

 

 

 

 

 

때문에 녹차 생산량이 훨씬 줄었다. 늦게 시작해서 속전속결로 일찌감치 끝내 버렸다. 하룻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날들이다. 찻물이 손바닥에 깊게 밸 시간도 없이.

 그리고 발효차.

 녹차에서 본 손실(?)을 황차로 봉창하려는지 여기도 황차 저기도 황차.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산을 이룬 찻잎. 황차 황차. 작은 이 세계는 온통 황차 천지였다.

 

 

 그러는 사이 초록이 짙어지고 시나브로 여름이 되었다.

차방에서 내다보는 창밖의 초록이 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각의 액자 안의 세계는 죽은 그림이 아니라 싱싱하게 살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저 영원한 생명력을 대할 때 나는 경외와 더불어 환희를 느낀다. 강원도 나의 숲에도 그것은 있지만 지리산 이 계곡에서의 생명은 또다른 매력을 준다.

 부디 저 신록을 닮아 내 생도 그랬으면 좋으리.

 

 

 

 

 

  떠나오기 전날 밤에 장사익을 만났다.

  찔레꽃의 향기가 가득한 계절. 그는 그 향기가 너무 슬퍼서 밤새워 울었다지만,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가슴을 헤집으며 목울대를 떠는 이 대목에서 나는 아직도 문을 열 생각도 못하고 이 나이까지 왔단 생각에 화들짝 정신이 들어 그래서 슬펐고, 문을 열라고 소리쳐 주어야 할 아버지가 없어서 서글펐고, 나머지는 사람에 걸맞지 않게 조악하고 후진 무대장치가 괜시리 서글펐다.

 

 

 

 

 

 

 이제는 일탈을 접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반천을 떠나오자 화두 같은 질문을 전해 온다.

 나헌티 할말 있지 않아요?

 할 말이야 왜 없겠는가. 하루 온종일 쏟아내도록 많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지나가고 나면 다 부질없음을.

 산에 들면 말은 똥이다. 그저 침묵으로 하늘과 숲을 대하면 그뿐.

 

 

 

 근디 먹을 것도 많은데 뭔놈의 나무 이파리를 따서는 사생결단 저토록 요란스레 법석을 떨어대는지. 그것도 정작 먹지는 않고 버리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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