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노래를찾아떠나는여행

그리운 바다, 청풍호

설리숲 2015. 12. 15. 22:55

 

 

  통영에서 제천을 들러 서울로 가는 날은 길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서울에서 라라와 이별했다. 언젠가 올 것이라 짐작하던 그것, 반갑지 않지만 꼭 실체를 보고야 마는 이별을 그날 서울에서 했다. 너도 나도 또 길 저편 신문사 초석 옆에서 캐러멜마키야토를 마시고 있는 아가씨도 한번 이상은 겪고 마는 흔하디흔한 행사라곤 해도 그게 또 그렇게 별것 아닌 것도 아니다. 쿨한 척 해도 몸 어딘가는 몹시 아프기 마련이고 마른 풀 버석이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그 안날 밤에 제천에서 디디와의 해후가 있었다. 이별을 할 때는 마른 풀 서걱이는 소리를 들어도 나달이 지면 간사한 사람 마음은 또 다 잊기 마련이다. 어느 봄 한철을 잠시 알고 지내던 디디는 이별이라는 관문도 없이 스르르 멀어져 갔다. 그러므로 그와의 관계는 아플 것도 애틋할 것도 없다. 그저 한 학기 짝꿍이었다가 여름방학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친구를 그리는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도 디디는 그밤 꽤나 센티멘털해 있었다. 다 잊자 응? 다 잊어야 한다구. 내 귀 밑에다 대고 사뭇 속삭여댔다. 그는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한 것 같았다. 기억나는 건 불콰한 눈두덩 그리고 잊어야 한다구, 연해 속삭일 때 나던 술냄새였다.

 

 이튿날 서울에서 이별을 하고 내려올 때 연해 문자가 들어왔다. 나 잊으면 안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그를 사랑했을까. 라라는 정말 나를 사랑했다. 너무도 빨리 타오른 게 흠이라면 흠일까.

 

 나는 평생에 결혼하지고 말한 적이 두 번 있다. 나이 들어 돌이켜보건대 그건 프러포즈도 아니고 청혼도 아니었다. 어린 녀석의 장난 이상은 아니었다. 진정성도 없었고 깊이도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정말 그와의 결혼이 절실하지도 않았고 명쾌한 미래도 없었다. 내가 지껄인 결혼하자는 말은 다분히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혼이란 말을 너무도 가벼이 개념 없이 뇌까렸다. 너무도 어렸고 철을 몰랐다. 물론 이런 것들도 다 나중에 돌이켜보며 알아진 것이었다. 두 여자를 그렇게 스쳐 보내고 나서 그 누구에게도 결혼하자 말을 내지 않았다.

 

 

 겨울의 강은 왠지 슬프다. 갈대숲 어디에 새 한 마리 숨어 꺽꺽 목울대를 삼키며 겨울 내내 울고 있을 것만 같다. 허옇게 얼어붙은 강상은 생각만으로도 을씨년스럽다. 디디의 집은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있었다. 여자 혼자 가꾸는 집터서리는 어쩐지 휑허니 썰렁해 뵌다. 마당은 물이 솟아오르다 얼어붙어 빙판이다. 서울로 이별하러 가는 내게 영월 집에 들르라고 했다. 아직은 푸른 물이 다 빠지진 않았을 텐데 이 여자는 왜 여적지 이리 외따로 있는 걸 좋아할까. 디디와의 관계에서 굳이 이별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도 그 어느 겨울이었다. 여러 날의 도보여행을 마치던 날 그가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돌아오면 내 집으로 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 와서 자라 했다. 냉골인 방에 불을 지피느라 고생하지 말라는. 자기는 그날 서울로 간다고. , 이게 이별이구나. 별로 아프지도 않은 이별. 그와 나는 너무도 가벼웠다. 마음을 주고받지도 않았고 더구나 사랑은 첨부터 원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면서도 남남은 아닌 미스터리한 관계였다.

 그는 내게 결혼을 말했다. 나는 철없던 시절 두 번 결혼을 말한 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내게 결혼을 말한 사람도 내가 말한 사람도 없었다. 연애 상대가 없는 게 아니고 가볍게 뇌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내게 디디가 결혼이야기를 했다. 너무도 쉽고 담담하게 내 규칙 안으로 들어와 깨뜨리려 했다. 아마 이 사람은 연애경험이 별로 없거나 내 지난날처럼 생활에 대한 진지함이 모자라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나는 짐작했다. 우리 사이가 스르르 거품이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만은 확실했다.

 

 나도 라라도 결혼을 말하지 않았다. 무언의 금기사항 같은 걸로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연이 다해 이별을 맞을 때도 비록 마른 풀 서걱이는 소리는 났지만 그 어떤 무게감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그쪽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 겨울 여러 날의 도보여행에서 만나 또다른 겨울에 이별하기까지 진정 무게 있는 진중한 연애를 했다.

 라라를 처음 만난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디디와 이별을 했다. 결혼을 말했던 디디는 아마 몹시 언짢았을 테고 짐작에 여러 날 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라라와 이별을 하고 오는 길에 그 디디를 만난 것은 이 무슨 운명이던가.

 그날 남한강의 강상은 두텁게 얼어붙어 있었고 그 위에 쨍한 겨울 햇빛이 쏟아졌다. 강을 굽어보고 있는 기슭. 디디의 창에도 강상에서 반사해 올라오는 빛이 하얗게 부서졌다.

 

 라라와 나와 호수는 맞지 않는 궁합이었던 모양이다. 그와 연애를 할 때 딱 한번 싸운 적이 있었는데 서울 석촌 호수를 거닐고 난 밤이었다,

그를 만난 건 청풍호였고 헤어진 건 선촌호였다. 석촌호를 거닐고 단 하넙 ㄴ싸웠고 그귀 석촌 호수 마지막으로 거닐고 헤어졌다.

 

 아 지금 디디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결혼을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물러가 버린 디디. 나는 철없는 시절 두 번 너무도 쉽게 결혼을 말하고 너무도 허탈하게 주저앉아 버렸다. 사랑과 연애는 결혼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 사랑과 연애 그 자체가 동기고 목적이고 수단이다. 중고생이 공부를 하는 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 반대가 돼야 할 것을.

 

 라라와 디디. 예전 소설 속의 이 이름이 참 좋다.

 함부로 가벼이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이때는 가을이었다.

이른 아침 청풍호에 피어오르던 신비한 물안개를 평생 잊지 못한다.

그날 만난 유정도 길래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날의 후유증으로 늘 청풍호를 꿈꾸곤 한다.

 

 

 

 

 

 이때는 여름이었다. 유난히도 습하고 무더운 날. 더구나 뽀얀 연무는 사람들을 질식사시키려고 작정을 한듯했다. 연무는 여름날의 청풍호를 카메라에 제대로 담지 못하게도 했다. 아 끔찍한 그날의 기억이여!

 

 

 

 

 

 

 

 

 그리고 2015

 다시 겨울.

 청풍호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세월의 덧없음을 느낀다.

 

 

 충주에 댐을 막아 놓고 충주에 있으니 충주댐이라 하였다. 충주댐이라 하였으니 호수 이름도 자연스레 충주호라 하였다. 그러니 제천 사람들이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뭐여. 물에 쟁긴건 죄다 우덜 땅이구 호수도 거진 제천인디 우티게 충주호라는겨? 피핼 봤어도 우덜이 더 많이 봤잖여. 이건 아니라고 본다 난...

 

 제천호라 하기는 속보이고, 그래서 다시 붙인 이름이 청풍호다. 옛날 청풍면 일대가 완전 수몰됐다고 한다. 청풍호라는 이름이 풍광과 제법 걸맞은 것 같다.

 

 

 

                                                    노윤태 작사 작곡 조재권 노래 : 청풍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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