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는 왜 갔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치기였을 수 있다. 그 나이쯤 되면 쓸데없이 반항도 하고 싶고 방황하는 척도 하고 싶고. 고분고분 만만하게 뵈는 게 영 재미없는 시기니까.
어쨌든 세월 지난 지금은 그 까닭도 모르게 광주엘 갔지. 가서의 행적도 전혀 모르겠고 거기 금남로의 아우성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살점 튀던 항쟁의 소용돌이도 이미 몇 해 전에 잠잠해졌건만 광주는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내막도 모르면서 나는 공연히 분노하는 척 했다. 광주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난 건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맹문도 모르면서 나는 그저 마음이 쓰라린 척 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몸이 아파오는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간 광주에서 쓰잘데기 없는 감상만을 얻어 자못 불의에 항거하는 열혈청년이 된 듯한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 같다.
겨울이 깊어 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 저녁 어스름에 희끗하게 눈발이 날리더니 호남선 기차에 올라 떠날 때는 제법 양이 많아졌다. 어두운 사위, 온통 칠흑의 세상이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엔 날리는 눈도 보이지 않았다. 역에 정거할 때만 낯선 플랫폼에 쌓여 가는 눈을 보며 왠지 뜬금없는 여수를 느끼곤 했다. 그리곤 잠을 잤다. 간간히 들리는 안내원의 안내방송이 꿈속인 양 아련하게 들렸다. 세상은 암흑이다. 밤기차는 두려움이었다. 저 무서운 지옥문 앞으로 우리를 유괴해 가는 것 같았다. 영원히 밤이 빛과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늘 찾아왔다 가는 그 어둠이 그날 밤은 너무도 길었다. 오래 잠속에서 헤매다 눈을 뜨고 또 잠이 들고 여러 날을 달린 것 같았는데 기껏 백양사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어느 천년에 서울에 도착할지 몹시도 막막한 시간이요 휘황한 공간이었다. 은하철도999를 타고 광막한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다시 개잠이 들었다.
어느 역에 멈췄다. 안내방송은 듣지 못했다. 차창밖엔 여전히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어둠 속 저만치 플랫폼에 서있는 푯말. 초강.
초강이 어디쯤일까. 낯선 역명으로 지점을 가늠하지 못했다. 보따리를 쓴 노인을 비롯한 두어 명의 승객이 발자국을 남기며 개찰구로 걸어갔다. 저이들은 밝은 대낮을 피해 왜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어둠 속을 왔을까. 이 시간에 도착하면 가족들이라도 마중 나와 있을까.
문득 초강이라는 이름이 정겹게 느껴졌다. 어딘지도 가늠 못할 마을이라면 분명 아주 작고 초라한 촌일 텐데 이러한 촌구석에도 사람이 있어 기차를 타고 내린다. 보이진 않지만 어둠 속 저 어딘가에 아주 푸근하고 넉넉한 부락이 있을 것 같았다. 아랫목은 열기로 절절 끓고 어린 손자는 초저녁에 잠이 떨어졌고 아직도 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는 곤한 눈을 부비며 등걸잠을 잔다. 우체국 옆골목 왕대포집에서 사내들은 밤이 이슥해지는 것도 모르고 오늘도 화투장을 내리쳐며 막걸리 추렴을 벌인다. 통금이 없어지니 세상 살기 참 좋아졌다고 투박한 엄지손가락으로 힝 콧물을 훔쳐내면서 황 노인은 전두환이가 참 대단헌 인물이라고 앞으론 더 살기 좋을 거라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얼큰한 막걸리와 시어꼬부라진 김치냄새, 그리고 방귀냄새가 뒤섞여 역겨울 법도 하지만 눈 내리는 겨울밤은 아늑하고 다숩게 놓여 있을 거였다. 어둠 속 어딘가에 초강이 그렇게 겨울밤을 보내고 있을 거였다.
역시 뜬금없이 언젠가 밝은 날 이 초강엘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밤은 너무 길어 영원히 밝은 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다시 긴 잠.
오랜 세월이 흘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어둠은 물러가고 그 사이 수많은 날들이 왕래했지만 그 밤 뜬금없이 했던 약속은 지켜지질 않았다.
역시 그 이유를 모르는 여행길을 나섰다가 어차피 목적지도 없으니 오래 전에 계획을 세웠던 초강엘 가기로 했다. 원래는 역시 눈 내리는 겨울에 가고 싶었으나 그게 무슨 의미도 없는 거라 낙엽 다 진 황량한 늦가을에 호남선을 탔다. 역시 광주에서 떠났는데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철도체계도 완전히 바뀌어 통일열차도 사라지고 삐까번쩍인다는 KTX가 들판을 내달리는 세상이 되었다. 초강역은 이미 폐쇄되었다고 했다. 오랫동안 동경했었던 초강이라 아쉽고 서운한 마음은 많았지만 어쩌랴 세월이 그러한데. 어쨌든 폐쇄된 역이라도 그 흔적이야 있을 테니.
신태인에서 내려 초강까지 걸었다. 시간이야 늘 넘쳐나는 몸이고 원래 도보 여행자니까.
내 예상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폐쇄된 역사 그리고 플랫폼의 잡초들. 녹슨 채로 잠겨 있는 철문. 시간의 흐름 앞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이 황량하고 초라한 풍경들도 다시 시간이 흘러 흔적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그날밤 눈을 밟으며 빠져나간 노인을 비롯한 두어 명의 사람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이 마을일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까 그 영감님은 아마 생존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완전 폐쇄된 상태라서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 속에 누워 있던 그밤의 플랫폼을 걸어보지 못한 채 떠나왔다. 그곳에다 무얼 두고 온 것 같은데 그 실체를 모르겠다. 그냥 가슴 한켠이 허전하고 싸한 느낌이다. 또다시 그곳에 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것에 대한 서러움과 아쉬움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