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곳을 무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지리산은 명산이 아니다.
영산이다(靈山)이다. 신령스런 곳이다.
웅장한 규모와 산세인 만큼 산자락마다 수많은 민초들이 깃들어 살아 왔다.
골골이 수도를 하는 선인들이 은둔해 있고 여전히 주민들이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곳.
우리 근대사의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간직하고 있는 곳.
물리적인 산이 아니라 신과 인간 철학 영혼 신비 탈출 비상
이 모든 것들의 상징익 집합체다.
설악산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지리산은 화려하지 않고 은근하다. 웅숭깊다. 흔히들 어머니의 품속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장엄함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외감이다.
지리산을 경외하고 그곳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해마다 조촐한 문화축제를 벌이고 있다. 지리산권 5개 시군이 해마다 번갈아 주최한다. 올해는 첫해에 이어 다시 구례군 사람들이 그 축제를 열었다.
한 장소에서의 일회성 공연으로 진행된 예년의 축제였지만 올해는 3박 4일의 여정을 둔 게 특징이다. <길위에서 만난 우리, 구례>라는 주제로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산과 마을, 신과 인간의 만남을 주 테마로 하고 있다.
그 첫날.
먼 길을 돌아 도착한 계척마을. 온통 산수유나무로 뒤덮였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민가가 몇 채 되지 않는다.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 산수유나무가 있다. 이 시목지 앞에서 기원제를 올리고 3박 4일의 축제를 시작했다.
지리산 둘레길.
혹자들이 불평을 토하기도 한다. 도시를 떠나 숲길을 맛보고자 둘레길을 왔더니만 그 호젓한 맛은 없고 마을을 통과하거나 남의 집 밭두렁을 지나가야 한다고. 길을 왜 그렇게 죄다 포장을 했느냐고.
그렇지만 둘레길은 최소 자연을 건드리지 않고 기존에 잇던 길을 이은 것이 특징이다. 어쩌다 한번 놀러 오는 사람들이야 시멘트포장길이 불만이겠지만 그곳은 엄연히 마을이다. 주민들이 살고 농사짓고 나다니는 길이다. 그들의 생활은 전혀 안중에 없단 말인가. 탐방객들을 위하여 마을을 피해 새로 길을 만든다면 그들이 경멸하는 자연훼손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조금만 양보를 한다면 그리 큰 불만은 없으리라. 다만 그 길들을 걸으며 주민들의 불편을 배려해 가면서 서로의 메리트가 공존하는 것을 지향해야겠다.
참가자들의 리더 애벌레
시목지를 출발해 탑동마을에서 첫날의 여정을 마쳤다.
마을회관 앞에서는 이미 음향 조명기기가 쿵쾅거리며 축제 무드가 조성되어 있었다. 어둠이 내리자 밤기온이 무척이나 쌀쌀했다. 마을주민들과 우리 참가자들이 한데 모여 저녁을 먹고는 마당에서 벌이는 공연을 즐겼다. 축제다. 술이 빠질 리 없다. 저녁 내내 불콰한 술향기가 온 마을을 휘돌았다.
가슴이 싸했다. 어린아이들이 보이질 않았다. 앰프가 쿵쾅거리고 차들이 모여들며 한껏 흥성거리면 애들이 더 신나서 이리 뒤고 저리 뛰며 저지레를 치기도 해서 어른들한테 야단맞는 게 일상의 정경이만 이 마을은 내내 아이들이 보이질 않았다. 딱 하나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혼자 돌아댕긴다. 그 표정에 흥분이나 호기심 같은 것들이 없다. 그냥 심심하고 외로워 보인다. 같이 말썽부릴 또래가 없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마을들은 고령화가 이미 극점에 다다른 형국이다. 아이들은 없고 노인들만 있는 사회. 이 노인들이 가고 나면 이 수많은 마을들의 미래는?
공연들이 끝나고 여흥으로 모든 사람들이 어울려 춤을 추웠다. 흥겹다. 마을의 미래는 잠시 잊고 그 열기 속에 나도 노인들도 한데 휩쓸려 들어갔다.
밤이 이슥하도록 참가자와 문화제 스태프들, 공연출연자들이 풍성한 막걸리에 배 두드리며 뒤풀이를 즐겼다. 이 사람들과는 문화제기간 동안 내내 이렇게 어울려 술을 마셔댔다.
첫날 걷는 길을 YTN 취재진과 동행했다. 나도 인터뷰 한꼭지.(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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