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만약에 눈이 안 보인다면, 귀가 안 들린다면
이 많은 아름다운 사물을 어찌 볼 것이며, 이 고운 음악들을 어찌 들을까.
아니 그 이전에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니.
모든 것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나는 정말 천복을 타고 태어났다.
그런데도 나는, 아니 행복에 겨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 한다. 늘 자신은 부족한 게 많다고만 한다.
알싸한 아침이다.
애매모호한 계절이다.
창경궁을 거닌다.
옛날, 사람들은 창경원 벚꽃놀이가 봄나들이의 최고봉이라 인식했던 때가 있었다. 심심산골 촌구석에서도 창경원은 누구나 들어 알고 있었고 최고의 동경이기도 했다. 벚꽃의 계절이면 사람이 미어터졌고 손을 놓친 아이들을 잃어바리기 일쑤인 때가 있었다.
동물원은 이사가고 왜놈들이 붙인 창경원에서 본디 이름인 창경궁도 되찾았다. 벚꽃은 이제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지천으로 피어 촌스럽게 몰려들지 않아도 된다.
휴일 아침 한가로이 거니는 창경궁 뜰.
바람은 아직 알싸하지만 이미 나무들은 잔득 꽃망울을 달고 금방이라도 특 터질 것 같다.
연못 위에 늘어진 수양버들, 노니는 원앙들.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노란 꽃망울들.
성질 급한 진달래가 하나 꽃잎을 펼쳤다. 어째 생뚱하다. 4월나 돼야 피는 진달래다. 이제 곧 눈이 지겹도록 볼 그것이지만 못 생긴 꽃잎 하나가 왠지 신기하고 대견하긴 하다.
바야흐로 세월은 또 뜨거운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듯하다.
서울의 사대문안은 갈 데가 참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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