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다.
겨울 한 철 내린 눈 보다 오늘 하루 내린 게 더 많은 것 같다.
춘분 지난 지 오래건만 강원도의 겨울은 참 지루하고 질기다.
마당의 눈을 치우다 뜬금없이 옛 생각 하나 떠오른다.
옛 생각들이야 무시로 찾아오는 것이지마는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가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직도 있을까.
탐스런 서설이 내리면 사람들은 낭만적인 감성에 젖는다. 눈이 내린 그날 그녀도 그랬나 보다. 남들도 걸핏하면 찾아가곤 하는 공지천엘 갔다. 불감청고소원이라고 맘 한쪽에 엷은 이성감정을 지니고 있던 그녀였다. 다른 때는 내가 그랬으나 그날은 첨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놀러가자 했다.
눈을 맞으며 눈을 밟았다. 엷으나마 이성감정을 가진 건 물론 나뿐이었고 그녀는 추호도 내게 어떤 실낱의 끄나풀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은 매우 즐거웠고 별 것도 아닌 그날이 유별나게도 기억에 남는 것이다.
안보회관 옆댕이에 둘이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 세웠다. 그걸로 미루어 연인도 아니면서 다른 연인들이 하는 건 그대로 다 했나 보다.
그리고 어느 땐지 모르게 슬그머니 멀어져 다신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마 내가 직장을 옮겨서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연인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헤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스쳐지남의 하나였다.
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냐만 문득문득 그 눈사람이 궁금해지곤 한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을까. 미친놈 별 미친 소리하고 자빠졌네. 한데.
한데 아직도 거기 안보회관 옆댕이 그 자리에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지금도 서 있을 것만 같다. 정말이다. 그 후로 근 20여년이 다 되도록 다시 찾지 못했다. 한번이라도 갔더라면 그 눈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싱겁게 돌아섰겠지만 그러질 못해 나는 아직도 그 눈사람이 그립고 궁금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짙었었나 보다. 그땐 별로 절절한 마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문득문득 그 눈사람이 궁금해지니 말이다.
언제 춘천엘 가게 되면 꼭 안보회관엘 들러 눈사람을 보고 와야겠다. 여러 번 춘천에 다녀오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안보회관엔 기회가 없어 못 갔다.
어쩌면 두려움이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서 눈사람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이놈의 지긋지긋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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