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동경

설리숲 2008. 2. 3. 23:04

 

 아무리 둘러봐야 산이다. 들도 없어 밭은 거개가 비탈밭이요, 논이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한 되지기논들이다. 그리고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이다.

 문명과는 너무 먼 오지였다. 아이들은 차 구경을 좋아했다. 이따금 저 아래 품안리 쪽에서 제무시(GMC)가 올라왔다. 탈탈거리는 낡은 트럭이 뭐 그리 대수라고 멀리서 엔진소리가 나면 애들은 개울가로 뛰어나갔다. 트럭은 아이들이 접하게 되는 문명이었다. 경운기는 고사하고 달구지 하나 없었던 그때의 산골이었다.

 제무시는 엔진소리 당당하게 개울가를 지나 아이들의 선망의 시선을 받으며 상류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신이 난 표정을 하고 흩어졌다. 산판에서 굴려온 나무를 가득 싣고 차는 또 내려올 것이니 그때 또 구경하러 나오리라.


 우체부가 타고 다니는 빨간 자전거가 신기하던 시절이었다. 트럭 말고도 가끔 택시를 구경하는 때가 있었다. 방안갓집 옥자가 신행 올 때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는 참말 근사한 차였다.

 함박골의 사촌누이는 멋쟁이였다. 시내에 취직이 되어 나가서 무지렁이 촌년들과는 그 양태가 달랐다. 세련된 양장에 뾰족구두(우린 삐닥구두라고 했다)를 신고 다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였다. 저만치 누이가 보이면 향긋한 분 냄새가 났다. 그렇게 세련되게 입고서는 가끔 택시를 대절해서 올라오기도 했다. 조붓한 길에 서 있는 택시에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만지고 들여다보고 문명에 갈증을 맘껏 풀어 보는 것이다.

 웬만하면 양장에 삐닥구두를 신고 택시에서 내린 그 여자가 내 사촌누이라는 게 자랑스러워 곤댓짓을 할만도 한데 나는 오히려 싫었다. 코흘리개가 뭘 알았을까만 왠지 정숙하지 못하다고 느꼈나 보다. 허벅지 드러내놓고 길바닥이 푹푹 파이도록 뾰족한 구두를 신고 함박골로 올라가는 누이가 남보기 부끄러웠나 보다. 한참 후에도 남아 있는 진한 화장품냄새도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그 누이는 평생을 그리 세련되고 우아하게 살았고 지금도 그리 살고 있다. 집에서는 늘 레이스 달린 홈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형은 볼품없이 꼬부라져 비천한 늙은이가 돼 있지만 누이는 여전히 분 바르고 얼굴이 팽팽하다.

 흠, 공주는 평생 공주로 산다 했지.


 나무를 가득 싫은 제무시가 품안리 저 아래로 사라진 뒤에도 나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곤 했다. 차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참 좋았다. 배기통에서 내뿜는 그 검은 연기가 얼마나 근사한지. 기름 냄새가 없어진 뒤에야 돌아오곤 했다.

 제무시가 휘돌아 사라진 산구비 저쪽 어디에 내가 모르는 신천지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애기지만 조금 더 크면 제무시가 간 저 길을 따라 그곳으로 가 보리라 맘먹었다. 거기엔 아이들이 그토록 갈급해하는 초호화문명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놀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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