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덤받이

설리숲 2007. 10. 4. 22:44

 

 요즘 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를 보면서 느끼는 단상.

 중년도 넘긴 남녀가 재혼을 해서 새 가정을 꾸민다. 그러나 여자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전남편의 자식을 데리고 들어간 자격지심에 늘 굽죄이고 지낸다.

 여자는 그런 것이다. 아직도 이 사회는 여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모른다.

 

 재혼한 여자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을 ‘덤받이’라 한다.

 비하하는 말임이 단어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남자의 자식은 따로 칭하는 단어가 없다. 유독 여자의 자식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말 그대로 ‘덤’이다. ‘받이’는 저급한 것에 대한 말이다. 씨받이, 구멍받이, 걸레받이, 짐받이……

 여자는 개가하는 것부터가 정숙하지 못한 걸로 치부돼 왔다. 그러니 그녀가 데리고 들어오는 자식조차 더러운 받이로 취급되어 불리는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여전히 재혼녀의 자식은 불편한 존재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든지 결코 그 집 자식은 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친부(親父)의 성을 가져야 하는 게 현재 이 사회의 법이다.

 전에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자녀교육관이 남달랐다. 결코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지론이었다. 제도권 학교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아이들도 그런 엄마의 뜻을 알아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 분의 그런 색다른 가치관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도 개중에는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신선한 감동이었다. 그 분에겐 위로 아들 둘에 막내로 딸 하나가 있었다.

 아들 둘은 학교를 보냈지만 딸애는 학령이 지났는데도 집에서 놀고 있었다.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학교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둘째 아들도 학교는 다니는데 안가는 날이 더 많았다. 제가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갔다. 내 보기엔 출석일수가 한학기에 20일이나 될까 하였다.


 그랬는데 2년 뒤 찾아갔을 땐 막내 계집아이도 학교엘 다니고 있었다. 왜 학교엘 넣었는가는 물어보질 않았다. 이미 그 분의 정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관이 남달라서도 아니고, 생활철학이 깨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 분은 창피했을 뿐이다.

 아이들은 성이 달랐다. 위의 사내아이 둘은 전남편의 자식이고 계집아이는 새 남편과의 자식이었다. 성이 다른 그것이 창피해서 입학을 아니 시킨 것이었다. 아니 시킨 것이 아니라 나중으로 미루었다 하는 게 옳다. 사내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계집아이를 들여놓았으니까.


 이런 경우가 어디 그 분뿐일까. 새로운 행복을 위해 새 가정을 만든 많은 여자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한다. 많은 논란이 있다. 나는 그것에 적극 찬성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자식들의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 같다. 정말 아무 죄도 없이 애먼 사람들이 받는 그 굴욕과 불행이 나는 정말 가슴 아프다.


 덤받이라는 말이 사전에 버젓이 올라 있는 우리말이긴 하지만 제발 이 굴욕적인 단어가 쓰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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