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안개 속에서

설리숲 2007. 10. 26. 00:35

 

  텅 빈 야영장. 오대산이다. 계절은 이미 가을이어서 관광객이 없다 그 넓은 야영장에 내 텐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새벽 1시.

 텐트를 걷어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 미륵암을 거쳐 상왕봉 비로봉으로 오를 요량이다.

 어제부터 줄곧 따라오는 계곡의 물소리. 눈을 떴을 때 아득히 들려오던 그 소리는 참으로 처량했었다. 울컥 고독감이 느껴져 하마터면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상원사 앞에도 어둠과 적요만 있다. 매점 앞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불쑥 아까의 고독감이 솟았다. 아, 그래서 다들 결혼을 하고 나이을 낳는구나. 지지고 볶으면서도 그렇게 올망졸망 무난하게 살려는 거구나. 혼자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은 것이란 걸 가끔 느끼곤 한다.

 여행지에서는 공연히 외롭고 허전한 기분에 휩싸이곤 하지. 그걸 즐기려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막상 그것이 몸을 휘감을 때면 비어져 나오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나도 인간이니까.


 구절양장 같은 길을 오른다. 아직은 깊은 밤. 어둠 속이지만 앞에 놓인 길만이 유독 하얗게 빛을 발해 랜턴을 끄고도 걸을 수 있었다. 어두우니 힘든 걸 몰라 그거 하난 좋다. 비척비척 어드메쯤 돌아보니 저 산 아래 휘영한 불빛이 보인다. 상원사다. 아니 기실은 저 휘황찬란하게 내쏘는 불빛이 온 산을 밝혀주고 있는 셈이다. 캄캄한 세상 가운데 그 불빛이 요사스런 귀기를 발하는 것 같아 내심은 불편하다.

 밤은 어두워야 한다. 고요해야 한다. 왜 밤에 불을 끄지 않는가.

 전날의 월정사도 그랬듯이 저토록 요사스러운 기분이 날만큼 환하게 불을 밝혀야 부처님의 법력을 받는 것일까.

 도시의 밤 허공을 수놓는 십자가들의 빨간 불빛들이 난 늘 못마땅하다. 여름엔 덥게 지내야 하고 겨울엔 추운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밤은 어두워야 한다.


 북대사 못 미쳐서 짐승소리를 들었다. 노루임을 짐작한다. 어느 때부터 내 뒤를 따라오는 걸 감지했다. 요즘 세상에 사람을 해칠 만한 산짐승이야 희귀하지만 워낙 후미진 곳이라 이런 데서 짐승을 만난다는 건 약간 켕기기도 하다. 오대산 같은 깊은 산중엔 승냥이나 살쾡이 혹은 여우가 출몰하기도 한다. 그리 무섭진 않지만 꺼 두었던 랜턴을 다시 꺼내들었다. 불빛을 보이지 않는 저 뒤쪽으로 비춘 채 걷는다.

 어렸을 때, 밤길은 정말 무서웠다. 노래를 흥얼거려 보지만 그러면 더 무서웠다. 그럴 때 돌멩이를 주워 양손에 하나씩 그러쥐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공포가 싹 가시곤 했다. 사실 정말 짐승이 있어 달려든다면 어린 꼬맹이가 던지는 돌멩이가 무슨 위협이나 줄까. 그렇지만 비장의 무기가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꼬마는 한껏 든든해지는 것이다.

 랜턴 불빛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따라오던 짐승의 낌새가 사라졌다.


 북대사에 다다르자 날이 허옇게 벗어지면서 풍광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온 산은 온통 안개다. 그럼 여태 나는 안개 속을 걷고 있었군.

 북대사에서 길을 버리고 좁은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단풍이 한창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것은 신비한 매력이었다. 선(仙)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황홀이다. 그저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렀다. 아무데나 찍으면 그림인 것이다. 안개가 짙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경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왕봉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 역시 안개 세상이다. 산밑에선 쉴 새 없이 세찬 바람이 올라오고 풀잎과 나무들과 낙엽들이 함빡 젖었다. 내 옷도 머리카락도 함박 젖었다.

 여기가 어디냐.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싶다. 둘러보면 온통 안개, 안개. 이 세계에는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 세상의 꼭대기에 나는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적멸보궁을 거쳐 다시 월정사로 내려왔다. 월정사 앞에는 그윽한 전나무길이 일주문까지 이어져 있다. 향긋한 솔냄새와 더불어 아침 특유의 싱그러움이 온몸을 감싼다.

 전나무길을 걷는데 갑자기 집이 그리워졌다. 돌아가야 별 아늑한 집도 아니면서 왈칵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집이 너무 멀다. 집으로 간다 해도 그 길에서 다시 마음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진부를 지나 삼척으로 가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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