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달이 나에게

설리숲 2007. 9. 19. 13:35

 

 밤이 몹시 추워 여러 번을 깼다. 도저히 잠이 편칠 않아 일어나기로 했다. 새벽 2시. 텐트는 그만두고라도 침낭은 겨울용으로 한 장만해야겠다.

 눈은 떴으나 밤 추위로 몸이 떨려 꼼짝하기가 싫었다. 계절은 아직 깊은 가을은 아니었다.

 그러나 움직여야 했다. 또다시 길을 가야 한다.

 물을 받아다 텐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버너에 불을 붙인다. 사발면 국물을 넣으면 좀 나아지겠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에 털어 넣고 화장실 가서 이 닦고 세수하고 면도까지 하고 나니 몸은 추워도 기분이 상쾌하다.

  

 배낭을 챙겨 메고 약수터로 갔다. 그 유명한 오색 약수터.

 그 깜깜한 밤중인데도 아주머니 서넛이 물을 뜨고 있었다. 부지런한 건지 아님 아직 돌아가지 않은 건지. 다들 커다란 물통 두 개씩 들고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물은 미치년 오줌 누듯이 찔끔찔끔 나온다. 저 물통을 다 채우려면 날이 밝을 게다. 쭈뼛거리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물을 뜨던 아주머니가 불러 세운다. 여기까지 와서 약수물 안 먹고 그냥 가냐고. 그 분의 배려로 먼저 내 생수통에다 물을 채운다.


 입장권을 사 들고 어두운 등산로로 들어섰는데 랜턴이 고장 났는지 먹통이다. 새로 사서 한번도 안 쓴 물건이다. 욕이 나온다. 씨발 아마 이거 중국산이겠지. 그럴거야.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메이드인 차이나를 확인할 수가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무작정 날이 밝을 때까지 죽치고 있을 일이 아득하다.

 그러나 매표소 쪽에서 떠들썩거리더니 일단의 등산객들이 올라온다. 한 서른 명 남짓 될 것 같다.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랜턴 불이 켜진다. 옳거니 이 팀에 묻어가야겠다.

 아하! 그제가 한가위 보름이었다.

 얼마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숲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제부턴 일행에서 떨어져 호젓하게 걸었다.

 아 저 달빛!

 얼마만인가 내가 달빛을 등불 삼아 길을 가던 것이.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엄마 심부름으로 마실 간 큰형을 찾아 밤길을 가던 그때 이후로 근 30여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기에 흐린 날만 아니라면 매일 떠 있는 저 달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나이를 먹었을까. 또 그간 밤길을 걸어본 기억이 없을까.

 도시에도 달은 뜨건만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여유가 없다. 그냥 앞만 보고 갈 뿐이다.

 달은 생명체들과 차원 높은 교감을 주고받는다.

 툇마루에 앉아 교교한 달빛을 받고 있으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이라도 잠시나마 근심에서 벗어나 신비한 마력에 젖어든다.

 명포수들은 보름날을 전후하여 사냥에 나선다. 보름달 아래 짐승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그들을 사냥꾼은 손쉽게 포획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름달에 정기가 있다고 믿었다. 임신하지 못한 여인 혹은 임신한 여인들도 달이 뜨는 밤에 나가 입을 크게 벌리고 달의 정기를 마시는 흡월(吸月)이라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그 정기를 받아 아이를 잉태한다고 믿었다.

 우주와 생명, 또 영혼을 연결시킴으로써 신앙으로 풀지 못한 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한국의 전통의식도 대부분 보름날에 행하는 것만 봐도 달은 신앙보다 한 단계 높은 경외감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그 신비한 달빛이라는 게 태양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단순한 빛 그 이상은 아니다. 지식을 더 쌓을수록 또 문명에 더 가까이 갈수록 동물 본연의 감정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같아 몹시 서글프기도 하다.


 그 밤 설악을 오르는 산길에서 경험한 달빛과의 교류는 이후 내게 커다란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오랜 나날들을 길 위에서 보내는 이른바 달팽이가 되었던 것이다.

 생활은 이렇듯 예기치 않은 ‘맞닥뜨림’으로 그 사람의 행로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1999.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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