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고등어

설리숲 2006. 9. 21. 11:31

 

  아버지가 고등어를 사 오면 난 벌거벗고 소금 마사지를 받아야 했다.


 내 고향은 강원도 산골.

 지금은 춘천시로 통폐합됐고 전에는 춘성군이었다. 소양강 댐이 생겨 수몰지가 되는 바람에 시내로 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 깊은 오지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장에 가는 날 아이들은 하루가 길었다. 지겹게도 가난한 산골 애옥살이. 장에 간다고 해서 애들이 혹할 뭐 하나 사 올 셈평은 도무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어서 밤이 돼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곤 어김없이 실망들을 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워낙 외진 산골이다. 시내로 나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산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덤부렁듬쑥 숲길을 헤치고 넘어야 했다. 나중에 포장된 길이 뚫렸을 때 에멜무지로 그 길을 걸었더니 두 시간 반이 걸렸다. 그러니 그 당시야 너더댓 시간은 좋이 걸렸을 게다. 밤길에 승냥이나 여우 따위의 짐승들이 인내를 맡고 어슬렁어슬렁 등뒤를 따라오던 시절이다.

 일찌거니 자릿조반을 먹고 떠나지만 긴 여름해가 넘어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오고가는 데만도 아홉 시간 열 시간을 잡아먹으니 기실 아버지가 장에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고기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동네에 혼인잔치가 있거나 초상이 나거나 해야 그때는 제법 고기를 먹었다.

 집집이 개나 닭 두어 마리씩은 키워도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었다. 알을 네서 돈사야 했으니까 달걀 하나도 먹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귀한 손님이 오면 닭 한 마리를 잡았고, 기껏해야 개울에 가서 고기를 잡아다 천렵하여 먹고 마는 게 고작인 우리네 가난한 산골사람들의 애옥살이였다.

정 육징이 나면 동네 어른들이 점찍어 놓은 뉘집 개를 대추나무에 매달아 패 죽여서 추렴하는 걸로 소증을 달래곤 했다.

 그래도 가끔 육고기는 아니라도 비릿한 생선을 먹을 때가 있는데 식구 중의 누구 생일일 때였다. 생일 상차림은 늘 정해져 있었다. 하얀 이밥에 미역국, 장 구운 김, 그리고 고등어!

 싯누런 보리밥 조밥이 상식(常食)이던 입에 하얀 이밥은 정말 기가 막혔다. 반찬을 넣기도 전에 꿀떡꿀떡 넘어가는 이밥. 게다가 김까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알짬은 고등어였다. 소금보다 더 잔 간고등어.

생선도 다른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가장 값이 싼 이 고등어가 우리네 식탁을 아주 가끔씩 풍성하게 해준 것이다.


 춘천은 내륙 깊숙한 안쪽에 있다. 그 당시의 교통사정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더구나 지역적으로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강원도의 상황은 오지나 다름없었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가 춘천까지 오려면 그 높고 험한 태백준령을 허위허위 넘어야 했을 테니 몇 날이 걸려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예 산지에서 소금을 뿌려 절인 채로 춘천시장에 들어왔고, 가게에서는 또 몇 날이나 묵었는지도 모를 고등어였다.

 그 몇 날이 지나도록 팔리지 않는 놈들도 있을 테니 가게주인은 이놈들을 어떡하든 팔아야 했다. 그럴 때 가게로 들어서는 손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같은 헙수룩한 시골 내미손이었다.


 아버지는 둘러보지도 않고 고등어 한 손 달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아도 가게주인은 이미 알고 있다. 딴엔 제법 두루마기도 입고 중절모를 눌러 써 모양은 냈지만 어수룩한 시골영감이라는 태가 질질 흐른다.

 그리하여 가게주인은 그 물간 고등어를 내놓는다. 그래도 아버지는 짐짓 역바른 체 한마디 던져는 본다.

 "이거 괜찮은 건가. 여름인데 금방 물커지지 않을까?"

 "아 그러믄유. 오늘 아칙에 딜여온 거라구유. 보세유 색깔두 번지르르하니 새카맿잖아유. 아저씨 증말 존 생선 사 가시는 거에유"

 필요도 없는 대화 몇 마디로 아버지는 가게주인이 건네주는 물간 고등어 한 손을 받아 들고 나오신다.

가져간 새끼끈에 그놈을 동여 매어 지게 고다리에 달아매고 다시 산을 넘어오시는데.

 때는 삼복.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판이다. 제 아무리 소금에 절인 생선이라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이미 물이 가 있어 도저히 사람이 먹을 생선이 아닌 것을 그 무더운 여름 낮에 너더댓 시간 걸려 매달고 오자면 생선은 썩은 물이 질척하고 급기야는 뚝뚝 흘러 떨어진다.


 그렇게 매달고 온 고등어는 한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다. 물크러질 대로 물크러져 흐물흐물한 살에는 이미 쉬파리가 까 놓은 구더기가 꼬물대는 것이다. 이 쉬파리란 놈은 알을 뱃속에서 부화시켜 곧바로 새끼를 까는 습성을 가진 놈이다.

 귀한 음식이었다. 어쩌다 맛보는 '고기'인 것이다. 우리 시골사람들은 구더기가 꼬물대는 그런 고등어를 맛간 생선이라 여기지 않았다. 원래 고등어는 그런 거라 여겼다.

 어머니는 칼로 구더기들을 싹싹 긁어냈다. 그리고 찬물에다 깨끗이 씻으면 말짱해 보이는 것이다.



 한번은 아버지가 된통 대로(大怒)하신 적이 있었다. 그날도 엄청 물쿤 날이었다. 아버지가 덜렁거리며 매달고 오신 고등어는 마루에서 먼발치로 본 내 눈에도 벌써 생선이 아니었다. 썩은 물이 찔찔 흐르는 그걸 받아 든 어머니가 정색을 하셨다. 내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뭐라고 엉절거리셨는데 아마 생선이 못마땅하다는 그런 투정이었을 게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뺨을 후려갈기셨다.

 "제미, 남은 기껀 사왔더니만 머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인내!"

 그리고는 고등어를 낚아채더니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물크러진 생선이 확 헤지면서 그 안에 한데 뭉쳐 득시글대던 구더기들도 땅바닥에 헤졌다. 갑자기 비위가 뒤틀려지며 내 인상이 일그러졌다. 놀란 구더기들이 사방으로 꾸물거리며 기어다녔다. 어느 결에 도둑고양이 하나가 내달아 와서는 덥석 고등어를 물고 달아나 버렸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는 걸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 비릿하고 맛난 고등어를 보고 비위가 상한 것도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역정을 낸 건 일종의 자격지심이었다. 늘 좋은 생선 하나 골라 오지 못하고 가게주인이 주는대로 상한 고기를 들고 오는 어리숙한 자신이 마음에 걸렸던 터다. 또 촌늙은이라고 업신여기는 가게주인이 야속하기도 했다. 똑똑치 못한 자신이 한없이 비참했을 거였다. 그런 속마음을 몰라주고 얄망궂게 엉절거리는 어머니가 순간 미웠을 것이다.


 그건 단 한번의 일화였고 어머니가 칼로 구더기를 긁어내고 구운 고등어를 먹는 저녁에는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포식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금에 절여진 짠 고등어에 어머니는 구울 때 다시 소금을 쳤다. 짜게 해야 여러 식구가 먹을 수 있었다.

 허나 고기에 주린 아이들이 짠 걸 아랑곳할 리가 없다. 한 점이라도 더 먹기 위해 밥술은 눈곱만큼만 떠 넣고 고등어는 왕밤만하게 뚝 떼어 먹었다.

 그 비릿하고 고소한 맛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그런데 고등어를 먹고 난 저녁에 나는 두드러기를 앓았다. 당연했다. 상할 대로 상한 생선을 먹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건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두드러기가 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어른들도 인식하고 있는 거였다. 한데 알 수 없는 건 다른 형이나 누나들은 안 그런데 꼭 나만 두드러기가 돋았다.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하면서 오한이 나면 영락없이 온몸에 우둘두툴 두드러기가 돋아 부풀었다.

 두드러기에는 기막힌 처방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소금이었다.

 어머니가 커다란 함지박을 갖다 놓으면 나는 옷을 죄다 벗고 벌거숭이로 함지 안에 들어가 섰다. 어머니는 됫박에 소금을 퍼다가 한 움큼씩 내 몸에다 비볐다. 온몸을 돌아가며 샅샅이 마사지를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알았다. 두드러기에는 소금이 직빵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소금으로 문지르고 자고 나면 아침에 두드러기가 없어져 있곤 했다.

 웃기는 일이다. 두드러기야 내버려 둬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런 걸 즉효약이라 굳게 믿고는 귀한 소금을 문질러 대는 우리 시골사람들의 무지함이랄까 순진함이랄까.


 그리고 왜 커다란 함지박에 어린애를 세워 놓는지도 알았다. 어린 소견에 그게 어떤 주술적인 걸 상징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웬걸, 실은 소금이 아까워서 그랬던 거다.

 고금으로 소금은 귀한 거였다. 그 귀한 걸 한 알갱이라도 헛되이 버릴 수 있는가. 내 알몸을 문지르고 난 소금은 다시 받아 두어야 했다. 그래서 함지박에 세워 놓았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몸땡이를 비비던 소금을, 고추 잠지까지도 문질러 대던 거를…… 그걸로 국을 끓이고 김치도 담그고.


 자꾸만 추억을 되새기면 나이가 든 징조라고 한다는데 나도 그런가 보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 -지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못 먹고 못 입고 하루하루가 삶의 고비의 연속인 나날이었어도, 그래도 사는 걸 지겹거나 무거워 하지는 않았다. 물론 어렸던 내가 뭘 알까만 그래도 요즘처럼 못살겠다고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거나 자식과 더불어 함께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다. 가족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버르적거리다가 부황 든 얼굴로 목숨을 놓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지만 말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소치라고 웃어 끝내기에는 뭔가 서운한 감이 있다. 적어도 그때는 사람 사이의 정이 있었고, 끈끈한 인간미. 뜨거운 가족애가 있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비관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가끔 옛일을 돌아볼 때마다 새롭게 느끼는 것. 물질적인 부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걸 절감한다. 과연 요즘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서늘한 숲 > 유년의 대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서운 광경  (0) 2008.01.23
개똥벌레  (0) 2008.01.21
진달래 그 붉은 유혹  (0) 2007.03.23
산골마을의 크리스마스  (0) 2006.02.13
엄마 생각  (0) 200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