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막내누이와 그 동무들은 진종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흥얼거리며 종이꽃을 만들었다. 나로선 처음 듣는 노래였다.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오늘 자고 낼 한 번 더 자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누구야?"
내가 물어도 누이들은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너무 꼬마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별 수 없었다.
어느 새 나도 그 노래를 다 배워 같이 흥얼거리며 안방과 웃방과 마루를 들락거리며 덩달아 신이 났다.
그 때가 다섯 살인지 여섯 살인지 또는 일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 유년의 기억은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도대체 순서가 없다. 그저 그 삼년 동안의 모든 것이 한데 얽혀 있어 아무 때나 끄집어내면 되었다.
깊고 깊은 산골 오지마을.
아침 느지막이 솟은 겨울해는 점심밥을 먹고 잠깐 있으면 어느새 산을 넘어갔다. 손바닥만한 하늘을 이고 순하고 질박하게 사는 그 산골 사람들이 크리스마스가 도대체 뭣에 쓰는 물건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날 우리 집은 잔치집처럼 들떠 있었다. 아니다. 나만 그리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낼 모레가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그날 밤에 우리 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했다.
아침부터 누이의 동무들이 몰려 와서 색색의 종이로 꽃을 만들고 광목천으로 귀신더버기 같은 옷을 만들기도 하면서 바야흐로 다가올 축제 분위기를 돋구었다.
아니다. 나만 들뜬 건 아니었다. 아침 일찌감치 나무 한 짐씩을 져다 놓은 내 형과 그 동무들도 두럭을 지어 다니면서 그날 밤에 있을 잔치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짧은 겨울해가 서쪽 산마루를 넘어갈 무렵 드디어 축제의 분위기는 고조되기 시작했다.
축제의 주동은 국민학교 다니는 형 누이들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학예회 같은 것이었다. 기껏 국민학교 꼬마들이 하는 재롱잔치야 우습고 유치하기 짝이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라는 생소하고 이름도 요상한 그것과 맞물려 한해가 저물도록 재미거리 하나 없는 산골마을은 서서히 무르익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났다. 뭔가 엄청난 잔치가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에 가슴은 한층 더 설렜다. 더구나 그 장소가 우리 집이라니 나는 자신이 축제의 주인공이 된 듯해 괜히 목을 세우고 집 안팎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마루에 막이 쳐졌다. 보꾹에 철사를 매고 거기에 싯누런 광목을 매달아 그럴듯하게 막을 치고는 소품들을 챙기고 준비한 제각기의 의상들을 걸치고 하다 보니 어둠이 내렸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무대인 마루에는 남포등이 양켠에 하나씩 걸려 제법 밝은 조명을 비추었다.
아 그 설렘이란!
작은 산골마을에 사람이야 얼마나 될까만 하나씩 둘씩 마당으로 들어와서 옹기종기 편한 자리를 잡는데 어린 눈에 마당 가득히 사람들이 운집한 것처럼 보였다. 동짓달의 찬 야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두런대는 소리가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어머니가 마당에 화로를 내놓자 몇 사람은 거기로 옹기종기 모여들기도 했다.
그리고 막이 열리는 순간 두 개의 남포등이 내는 빛이 마당으로 쫙 퍼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마당에는 멍석이 깔렸지만 밤기운이 을씨년스러워 앉은 사람은 몇 안되고 외양간 구유에 기대선 사람, 대문 설주에 기댄 사람, 화로를 끌어안듯 한 사람, 잇짚을 방석 삼아 깔고 앉은 사람, 킁킁 보채는 갓난애를 달래려 엉덩이를 추썩이며 섰는 사람, 연신 기침을 쿨럭이는 사람…… 제각각의 무질서한 중에도 눈은 마루로 향해 있었다.
아이들의 연극이 시작되었다.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고, 해괴한 귀신이 여럿 번갈아 나왔다 들어가고.
다음엔 동네 청년 하나가 등장하여 유행가를 불렀다.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건만-' 운운하는 '동숙의 노래'였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려졌던 노래라, 초군(樵軍)들이 나무를 하러 숲을 다닐 때 자욱길에서 길게 목청을 뽑아 부르는 그 노래였고, 산더미만큼 마들가리를 지고 우리집 앞을 지나면서 흥얼거리던 것도 그 노래였다.
그런데 그날 밤의 '동숙의 노래'는 자욱길에서 들려 오던 곡조 엉성한 노래와는 영판 달랐다. 장소 탓이었으리라. 희부연 조명 아래서 청중을 함께 하는 노래는 사뭇 가슴에 파고드는 열정이 있었다.
박수와 함께 또 이어지는 아이들의 무대. 낮에 우리 집에서 오리고 접고 만들었던 그 꽃을 머리에 꽂고 여자아이들이 무용을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 처마끝을 지나 밤하늘로 오르던 그 황홀한 곡조를 언제 다시 들어볼 텐가!
그 광경을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나중에 북한 어린이들이 서울 와서 공연하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밤은 짙어 가고, 싸늘한 야기가 내렸지만 분위기는 고조되기만 했다. 다시 동네 청년 하나가 '물어 물어 찾아왔소' 하고 역시 자욱길에서 들려 오던 노래를 하고 박수를 받고 퇴장하고……
누군가가 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다. 시뻘건 불이 겨울하늘로 치솟자 축제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같은 불이라도 모닥불은 생명이 있다. 무대에 내리는 조명 따위는 죽은 불이다. 생명이 없다. 본디 인간들은 신앙을 담은 제의(祭儀)에 이 생명의 불을 놓았다.
불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열정의 불꽃이 하늘 높이 솟구치며 인간의 가슴에 신이 들어온다. 태초부터 신과 인간과 불은 하나였다.
그날 밤의 그 황홀하고 흥청한 축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 밤을 생각하면 마구 가슴이 뛰논다. 아마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 정열의 불꽃을 죄다 가슴에 뜨겁게 안았을 것이다.
노랫소리는 산골짜기 깊은 숲으로 퍼져 가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박수 쳤다.
생명의 불이 사위어 가면서 축제는 끝이 났다.
최면에서 풀려 난 사람들이 구물구물 돌아갈 차비를 하고 나는 부엌 앞에 선 채로 멍했다. 이유없이 허무해졌다. 휭하니 빈 가슴으로 싸늘한 겨울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고, 귀는 먹먹하니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쪼르르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광목 막을 떼어 내면서 누나와 동무들은 여전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흥얼거렸지만 어쩐지 그 가락에도 허무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깊은 겨울밤 하늘에 별이 쓸리고 있었다. 그 한공의 별을 쳐다보며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