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적의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무슨 행사 때면 어머니와 마을 아낙들은 소댕을 뒤집어 걸고 메밀 적을 부쳤다. 밀가루와는 사뭇 다른 메밀적만의 독특한 향과 맛.
오래 잊고 지내다가 정선에 와서 다시 그 냄새를 맡게 되었다. 장날이면 여기저기서 부쳐대는 그 향에 아스라한 옛 정취를 느끼곤 한다. 강원도만의 향토음식인 전병도 메밀이어야 말 수 있다. 어쩌다 다른 곳에서 먹게 되는 전병은 다 밀가루 적이라서 영 맞갖지가 않다.
가을이면 소금을 뿌린 듯 새하얗게 피던 메밀꽃. 요즘이야 곡물로서의 실용성은 퇴색하고 그 꽃구경 오는 관광객들의 눈요기로 전락하고 있지만 예전의 메밀은 엄연한 식량이었다.
가을날 누워 있다 보면 베개 속에서 세월이 오는 걸 듣는다고 옛사람이 그랬는데,당최 무슨 말인지 몰랐더니 근래 참 오묘하고 심원한 미립이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나깨는 메밀의 껍질이다. 메밀을 타고 그 껍질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왕겨 대신 외양간에 깔기도 했고 풍로를 파묻어 군불을 지피기도 했다. 가장 요긴하게는 나깨로 베갯속을 넣었다. 아마 시골에서 베갯속으로 가장 많이 쓰였을 것이다.
이 메밀 베개를 베고 누우면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묘한 쾌감을 준다. 그러다 문득 그 안에서 세월이 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 그게 그 소리였구나.
가을이면 또 절실하게 느껴는 세월의 흐름.
이제 메밀나깨 베개는 아니어도 찬바람 스며드는 이런 계절이면 베갯속 어디선가 그것이 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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