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노래들을 보면 온통 영어 일색이다. 제목도 그렇고 노래 가사 중에 영어 한마디 안 들어가는 노래가 거의 없다. 노래 뿐 아니라 가수들 이름도 그렇다. 예명을 꼭 영어로 지어야 세련돼 보이나 보다. 그룹은 물론이고 솔로가수들도 예외 없다.
한데 따져 보니까 요즘 연예인들만 비난할 건 아니다. 기실 예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블루벨스, 이씨스터즈, 키보이스, 영사운드, 히식스, 신카나리아, 쓰리보이, 트위스트김, 후라이보이, 트윈폴리오, 김세레나 등등.
너무 만연해 가는 걸 걱정했던 걸까. 아니면 외국어를 일소하는데 강력하게 작용했던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어쭙잖게 따라했던 걸까. 박정희는 불현듯 칼을 들어 연예인들의 이름에 들이밀었다. 그래서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투에이스는 금과은으로 개명했다. 어니언스는 ‘양파들’로 바뀌어서 실소했고, 패티김은 김혜자가 되었다. 또 김세레나는 잣수를 줄여 김세나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제화시대를 표방해서인지 겉멋이 들어서인지 가수들의 외국어 남발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훈아의 노래들을 접할 때마다 공연히 찐덥다. 60년대부터 이어진 수많은 히트곡(요것도 외래어네..)을 열거해 봐도 제목에 외국어가 들어간 노래가 없다. 노래들의 주제가 토속적인 영향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순우리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님 그리워, 어매, 사랑은 눈물의 씨앗, 영영, 물레방아 도는데, 모르고, 사내 등등.
그중에 나는 ‘갈무리’가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농사꾼은 한해의 일을 마치고 그냥 겨울을 맞는 게 아니라 내년의 농사를 위해 씨앗을 보존하고 관리한다.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갈무리’라 한다. 이 말을 모르고 있다가 나훈아 덕에 사전을 찾아 안 것이다. 오호, 새로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이여.
노래는 차치하고 우리말을 즐겨 사용하는 나훈아가 그래서 나는 존경스럽다.
농사를 모르는 백수인지라 나는 가을에 갈무리할 게 없다. 오늘처럼 마당에 피었던 코스모스 씨나 받아서 편지봉투에 넣어두는 따위의 별 신통하지도 않은 것만 아니라면.
그나마 코스모스 실하게 여문 씨앗들을 받을 때 제법 계절감을 느끼면서 내년에 새로 필 꽃들을 상상하면서 어설픈 ‘갈무리’의 즐거움을 맛보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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