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장밋빛 인생 - 어느 간이역에서

설리숲 2008. 10. 9. 20:04

 

 

 

 

 

 계절이 깊어갈수록 쓸쓸해지는 풍경들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

 이곳을 가기 위해 많이 발품을 팔았다.

 영동선 도경리 역(驛).

 

 사라져간다. 세상에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 있으리.

 새물내 나는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에 보퉁이 하나 가슴에 안고 기차를 기다리던 노인이 있었다. 강릉엘 가고 태백엘 가고 저 멀리 경상도 영주를 가려고 누추한 역사에서 시산을 보내던 촌부들이 있었다.

 기차, 기차역은 그런 곳이다. 그리움과 설렘과 기쁨과 슬픔 아쉬움들. 우리 생활의 희노애락이 점철된 곳이 기차와 그 역이었다.

 

 

     

 

 

 도경리역에 기차는 서지 않는다. 숱한 그들의 사연들도 사라져 버리고 앞으로도 사연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청량리에서 달려온 기차는 길게 기적소리 한번 뿜고 그냥 지나쳐 강릉으로 내빼 버리고 있다.

 

 

                                                                                                  

 

 

 

 

 

 간이역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사실 도경리 역은 간이역은 아니다. 이미 폐쇄된 역이다.

 역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이 역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꾸만 신식 건물로 교체되는 세태에 도경리 역사는 과거 처음 지어진 그 건물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동해 역에서 두 시간을 걸어서 도경리 역을 찾았다. 시멘트포장은 했지만 들어가는 입구는 구불구불 사행길이다. 과연 역이 폐쇄될 만큼 외진 길이다. 예전에 민가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역사 앞에 두 집만 있다. 그러니 기차가 이 역을 들렀다 가는 걸 바라는 게 무리다.

 

 

 

     

 

 

            

 

 

 

 가을 햇볕에 바알갛게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그저 부드러운 바람만이 숲과 나뭇잎을 흔들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차는 서지 않지만 영동선과 태백선이 종일 드나들고 지나가는 덕에 레일은 녹슬지 않고 햇빛에 반짝거렸다. 퇴락한 역사라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모양이다. 대합실과 화장실도 정갈하게 청소가 돼 있고 플랫홈에도 조촐하게나마 화초들이 가꾸어져 있다.

 철로 옆에 산수유가 한창 익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었다.

 이 쓸쓸한 옛 역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가을볕이 하도 좋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느닷없는 그 비보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진실 그녀가....

 아뿔싸! 세상은 또한번 사람들의 머리통을 망치로 내리쳤다.

 

 누구나 한번은 가는 거지만 그래서 더욱더 무섭고 슬픈 거지만 그녀의 비보는 무섭다기보다 또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허망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 이제껏 수많은 죽음을 접했지만 이렇게도 가슴이 비어진 적이 없었다. 나와 그녀는 일면식도 없고 성(姓)이 같은 것도 아니고 고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화면으로만 보던 게 다였다. 그런데도 왜 그리 막막하고 애련한지.

 

 

 장밋빛 인생을 꿈꾸던 여인.

 그 붉은 장미 같은 여인이

 그러나 장미처럼, 화려한 꽃잎이 시들고 떨어지듯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잠시 세상은 공황에 빠진듯했다.

 시간이 가면 그녀는 또 세상으로부터 잊힐 테지만 아직은 가슴 안에 휭하니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속살거리던 앳된 얼굴과,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검고 메마른 입술 달싹이며 죽어가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오버랩 되면서 슬픔을 자아낸다.

 

          

                                                         

 

 

 마지막 몸부림인 듯 배롱나무 꽃잎이 애절하게 붙어 있다. 저 꽃도 곧 떨어질 것이다. 제행무상이라. 어디 영원한 게 있으랴.

 내가 눈앞에 보는 이 모든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해 버릴 테니, 그 유한의 운명 앞에서 나는 자꾸만 나약해진다. 곧 나뭇잎들이 시들 것이며 가뭇없이 사라져 춥고 마른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네 삶도 하나둘 어디론가 사라져 가겠지.

 반항하지 말고 그 순리대로 살자. 어차피 나와 모든 것들은 제각각 주어진 역할과 운명이 있으니.

 

 

 도경리 역에 점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눈을 감으면 문득 떠오르는 그때 그 아름다운 날들

        어느덧 내 나이도 지나온 추억을 그리워하게 됐나

        장밋빛 인생이라 믿고만 싶었던 그 시절 어디엔가

        내 기억이 멈추는 그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장밋빛 저 하늘로 또 다시 아침은 밝아오네

        함께 했던 시간은 다 지나 버리고 이제는 홀로 남아

        사랑했던 것만큼 커버린 아픔에 가슴이 메어 오네

        꽃이 피고 또 지고 가을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쓸쓸한 거리를 바라보네

        이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

        빨간 장미 꽃잎은 시들어 하나 둘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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