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늦가을이었다. 그 아침,
스산했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길위에 수북이 떨어지고 있었다. 찬이슬이 흠뻑 적셨다.
"어쩐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네요"
스산했다. 늦가을이어서가 아니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내려 쌓여서도 아니고 빌어먹을 이슬 때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가슴은 울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라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를 뿐.
그녀가 떠난다고 한다. 플라타너스 잎이 지는 그 가을 아침에 그녀가 나를 스산하게 했다.
"지금 떠나지만 다시 올거니까 아쉬움은 그만 접어야겠죠"
미국이라던가 영국이라던가. 3년간의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거늘 그 아침에 휭하니 가슴으로 들어오는 바람.
"요즘에 잘 어울리는 노래 한 곡 들어 보시죠. 제목이 참 쓸쓸하군요"
나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더니 아예 남자를 따라 유학을 간다 했다. 내 사랑의 마지막 음성을 듣는 그 아침에 나는 갈 곳을 몰라 플라타너스 잎 수북이 쌓이는 길위에 앉아 있었다.
"사람과 나뭅니다. 쓸쓸한 연가"
그녀가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댈 사모하는 내 마음을 말하고 싶지만
행여 그대 더 멀어질까 두려워
그리고 그날 아침 방송을 끝으로 그녀는 내게서 멀리 떠나갔다.
처음에 참 싱둥하고 생기발랄하더니……
화려하기만 한 다른 아나운서들보다야 외모는 통통하고 좀 처지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의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그녀였다.
내 사랑을 알 리 없는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저 쓸쓸하기만 한 노래를 마지막으로 주고는 멀리 떠나갔다.
그녀가 최은경이다.
지금이야 그저 그런 뚱뚱한 아줌마가 돼 있고, 내 애정도 엷어진지 오래지만 그때 나는 참으로 슬프고 스산했었다. 7년 전의 가을이니 그때만 해도 나는 30대 중반의 아직은 파랗게 감수성이 남아 있었으리.
그랬는데 내 애정은 시나브로 엷어졌고 3년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그냥 밍밍해져 있었다.
무시로 TV 화면에 그녀가 나와도 별다른 감정도 없이 그저, 내가 전에 저 여자를 좋아했었지 근데 뭐 별다른 매력도 없네, 이런 거다.
오히려 서글프다. 사랑이란 게 대수롭지도 않은 시간 따위에 이토록 묽어지는 건가. 불꽃같이 뜨거워 보이던 사랑도 오래지 않아 사위어 버릴 것을. 부질없는 게 남녀간의 사랑이라 못 믿을 게 사랑이라.
오늘도 최은경 아나운서는 브라운관에서 나를 향해 웃건만 나는 무심히 내일 비가 올 건가에 생각을 준다.
그날 아침 그녀가 내게 들려준 '쓸쓸한 연가'라는 노래를 찾아 많이도 헤맸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닌가요?
내가 <사람과 나무의 쓸쓸한 연가>를 찾으면 레코드가게 주인은 꼭 그렇게 되묻곤 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룹이라 지방 소도시까지는 확보가 안됐을 거다.
결국은 서울까지 가서- 서울의 레코드점에서도 저 질문을 많이 했다 - 그 희귀음반(?)을 사긴 했는데 '쓸쓸한 연가' 외에는 별로 들을 만한 노래가 없었다.
가을철이 되면 그래도 저 노래가 제법 나오는데 그럴 때 최은경 그녀가 떠오르긴 한다. 그러나 그저 그뿐. 아무 것도 내 마음엔 남아 있는 게 없다.
이 노래는 세칭 588이라 불리는 청량리 사창가의 한 여성의 사연을 담은 노래라 한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허무한 사랑의 편린을 잡고 쓸쓸히 퇴락하는 시린 이야기다.
사람과 나무 일원이 아닌 솔로로 이수경이 새로 불렀다.
이정환 작사 작곡 이수경 노래 : 쓸쓸한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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