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경부선 심천 역

설리숲 2009. 1. 26. 19:07

 

 죽도록 외로우면 기차를 타라

 

                             심천역

 마음의 뿌리는 밤새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말나리꽃이 피고 있었다
 호박꽃 속에 별들이 숨었다
 달이 따라왔다
 도라지빛 슬픔이 갈앉았다
 돌절구에 찧지 못하는
 네 마음의 뿌리가
 마음이 되었다 실개천이 되었다
 천개(千個), 만개(萬個)의 산
 몇줄의 시(詩)처럼
 심천역은 네 마음의 뿌리를 심었다
 육교를 오르내리는 거리,
 그 길은 마음의 고향 같은 것
 심천역에는 네 마음
 산길 위, 낮 달로 떴다
 가지 마라, 네 마음이여
 사랑의 네 마음은 낮달이다
 마음의 산란으로 네 사랑을 낳으면
 그것은 그리움이다
 심천역에 가면 네가 바람이거나
 낮달이다, 수도사(修道士)처럼
 긴 목도리를 늘이고 영원한 철로길 속에
 나는 숨는다
 심천역에 가면 네가 걸어온
 사랑의 길이 잘 보인다
 네 삶이 걸어 간 길이 잘 보인다
 천개, 만개의 산처럼 산도 가지를 뻗어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낳고 낳아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부르는
 생명의 잉태, 다시 사랑으로 만나는
 심천역에 가면 네 사랑,
 뿌리깊은 나무,
 마음 깊은 뿌리가 되고 싶다

 

                                    박해수

 

 

 

 

 

 

 가을도 깊어 여차하면 서리가 내려 겨울로 바뀔 수 있는 계절이다.

 만산홍엽, 세상은 만추의 절정이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곳이 충북 영동이다.

 읍내 거리의 가로수가 감나무여서 가을이면 발갛게 익은 홍시가 아름답던 그 영상이 각인되어 있다. 

 그건 읍내의 이야기고 심천은 하나도 이쁠 것도 생각나는 것도 없다.

 

 몇 년 전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들르게 된 곳이 심천이었다. 다 낡아가는 역사(驛舍)의 허줄함이 기억이라면 기억이랄까. 명색이 면소재이면서도 정말 작고 보잘것 없는 동리. 그 조촐함(?) 여전히 변함이 없다.

 영동엔 여자친구가 있다. 가끔 마음이 스산해지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그를 만나러 영동엘 가곤 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갔던 게 아니었구나. 한번 그의 포도밭에 일손을 도우러 간 것 빼고는 늘 내 기분이 침잡해져서 전환이 필요할 때 였구나. 그러고보니 참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어쨌든 무심하게 만난 게 심천이었고 그곳은 아직도 별 감흥이 없다. 그때, 우연히 잘못 들어간 심천에서 아무케나 핸들을 돌려 찾아들어 간 곳이 금강이었다. 한국 지리에 관심 많았었지만 그곳에 금강이 있을 거라는 건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금강은 참 아름다운 강이다. 구비구비 휘돌아가는 강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그때가 여름이었는데도 수량은 많지 않아 정답고 포근한 정서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뭇 이어지는 모래톱.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작이는 금모래빛 하는 노래가 그대로 적용되는 금강. 그때 이 금강을 따라 처넌히 드라이브를 하며 느꼈던 감상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2008년 심천은 여전히 조촐하다.

 별들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70년대 영화들의 배경으로나 제격일 듯한 퇴색하고 색바랜 흑백의 정서다.

 심천 역사는 새로 도색을 해서 산뜻한 맛은 있지만 그게 오히려 촌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가을은 이미 끝나가고 먼 북쪽 어느 곳으로부터는 칼바람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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