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동지팥죽 이야기

설리숲 2008. 12. 21. 15:44

 

 옛날 가난한 집에 며느리가 있었다.

 어느 겨울날 팥죽을 쑤었다. 가난한 집이라 그것마저 넉넉하게 쑬 형편이 안됐던 모양이다. 시부모와 남편을 한 그릇씩 떠 주고 솥에는 팥죽이 더 남아 있었지만 며느리는 그냥 굶고 말았다.

 그날 밤에 그녀는 자꾸만 부엌의 팥죽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 참다 결국은 몰래 부엌으로 나가 한 그릇 푸긴 했는데 마땅히 먹을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곳이 있어 죽그릇을 들고 살금살금 간 곳이 뒷간이었다.

 한편 사랑채의 시아버지도 또한 팥죽이 눈앞에 어려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한 그릇 훌훌 마셨으면 좋으련만 갖다 달랄 수도 없었다. 견디다 못해 체면 불고하고 부엌으로 나가 한 그릇 퍼 들고는 역시 먹을 데를 찾다가 살금살금 간 곳이 또 뒷간이었다.

 시아버지가 뒷간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한창 팥죽을 퍼먹고 있던 며느리는 너무 놀라 그만 목이 걸리고 말았다.

 

 며느리는 그렇게 비운에 갔고, 그때부터 변소에 갈 때는 반드시 흠, 헛기침을 해서 인기척을 알렸다고 한다. 비명횡사한 며느리를 위해 매년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현대 서양식 화장실도 '노크'는 필수 에티켓이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노크가 생활화 돼 있었다.

 시골 뒷간은 변변한 문 하나 제대로 달지 않고 가마니 따위의 거적때기로 허술하게 막아 놓았으니 지금의 노크와는 방식이 달랐다. 그저 문 앞에 가서 큼, 하고 헛기침을 하는 게 말하자면 노크였다.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인기를 안 내고 그냥 불쑥 들어서면 안에 있던 귀신이 놀라 그 사람에게 덮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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