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모텔

설리숲 2010. 2. 19. 22:48

 

 

 여관은 잠 자는 곳이다.

 언제부턴가 퇴폐업소로 전락되었다. 여행자가 묵고 잠을 자는 게 퇴폐행윈가.

 

 나는 여관에 이골이 났다.

 전국을 떠돌며 여관에 바친 돈을 계산해 보면 거짓말 안 보태고 집 한 채는 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백수인 내가 알게 모르게 어지간히 돈도 많이 번 셈이다.

 

 혼자 모텔에 들어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여관 주인과의 대화 내용은 다 똑같다.

 주무실 거에요? 네(요 부분은 숙박할 거냐 잠깐 쉬었다 갈거냐 묻는 거다)

 혼자에요? 네

 침대 드릴까요 온돌 드릴까요? 아무거나

 삼만 원입니다 또는 삼만 오천 원입니다.

 그게 다다.

 돈과 방 열쇠만 주고받으면 이후론 얼굴 볼 일도 말 걸을 일도 없다. 이튿날 아침 나갈 대도 그냥 열쇠만 놓고 나가면 되니까.

 예전엔 방명록이란 게 있어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기재하고 다음 여행지까지 적는 난도 있었다. 배를 탈 때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인적사항을 적는 것과 같은 거다.

 물론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가끔 여관에서 일어나는 인사사고가 있으므로) 형식적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한번도 내 진짜 인적사항을 써 넣은 적 없다.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다음 여행지도...

 그래서일까 이 방명록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래야지. 어차피 죄다 허위기재니 그 처음 취지가 무색하니까.

 

 어쩌다 필요도 없는 말을 걸어오는 주인이 있다.

 - 아가씨랑 같이 다니시지 혼자 여관엘 오세요?

 물론 악의도 없고 놀림도 아닌 걸 안다. 그저 내 집에 온 손님 접대하느라 그러겠다.

 그렇지만 그런 접대는 영 아니올시다.

 남이사 혼자 다니든 떼거리로 다니든...

 여관주인부터가 '여관은 아가씨랑 같이 드는 게 상식'이라는 개념이 난 마뜩치 않은 거다.

 

 어제는 담양에서 모텔엘 들었다.

 이례적으로 앳된 아가씨가 카운터에서 객을 맞는다. 뒤에는 주인인 듯한 남자가 앉아 있다.

 주무시고 가실거에요? 네

 몇 분이세요? 혼잡니다.

 역시 똑같은 말마디들.

 이때 주인인듯한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끼어든다.

 - 허허 설인데 혼자 여관에...

 명절이면 잠 자지 말라는 건가. 명절이면 여관에 오지 말라는 건가.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닌 걸 안다.

 다들 가족이나 친지를 찾고 고생고생 빽빽이 밀리는 귀성길에서 시간을 보내고 많든 적든 모여앉아 떡국에다 전을 먹고 손자놈 손에 꼬깃꼬깃 쌈짓돈 쥐어주는 명절의 그 풍성하고 풍요로운 설이라.

 그 민족 고유의 설 전야, 섣달 그믐밤에 여관에서 자겠다고 혼자 털레털레 들어오는, 어딘지 모르게 풍요로워 보이지 않는 나그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기는 하다. 생경한 기분인지 동정의 마음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렇지만 제발 관심은 꺼 줬으면 좋겠다.

 여행을 하든, 고향엘 가든 여관은 그저 하룻밤 따뜻하게 쉬고 가는 곳이니까 별 다른 의미는 필요없음을.

 

 

 설날이다. 웬만한 상가는 죄다 문을 닫았다. 음식점도 문을 닫았다.

 풍성한 명절인데도 나그네는 오히려 먹을 게 주리다.

 이방에서 홀로 자취하는 사람들, 일 때문에 못 가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먹을 게 넘쳐나는 날이지만 슈퍼에서 빵이나 사서 먹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풍성한 명절은 아닌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모텔 앞에 숙박 30,000원 대실 20.000원이라 쓴 걸 보고 와! 대실이 이만원인데 왜 큰방이 더 쌀까 했단다. 나도 예전엔 대실이 큰방인줄 알았다.

 크리스마스 등 무슨 타이틀 붙은 날 전야나, 토요일밤에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방을 구하기 쉽지 않다. 그날은 대실 손님을 많이 받기 위해 숙박손님을 꺼려한다.

 그렇다. 대실 손님은 당연 남녀 쌍쌍이겠고 그러고 보면 여관이라는 것이 유흥과 퇴폐업소라는 게 짜장 맞는 이름이겠다.

 난 연애를 하면서도 한번도 대실을 써 본적은 없다. 여관은 잠 자는 곳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주의 밤,

 여관이 없다. 안 보인다. 없는 게 아니다. 안보이는 게 아니라 방이 없어 일찌감치 간판 불을 다 꺼서 그러다. 8월 초. 여름의 절정이다. 게다가 토요일이다. 여름휴가의 최고 피크라 경주 시내에 방이 동났나 보다.

 어디 가야 모텔이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나는 쪽팔려서 못 하는 걸 그녀는 뻔뻔하게 잘도 한다.

 

 여관비는 되도록이면 카드 말고 현금으로 낼 일이다. 당연 청구서가 집으로 날아오니 명세서를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우리 저기 쉬었다 갈까?

 아니 안돼.

 잠깐 앉았다 가자 오빠 믿지?

 오빠는 믿는데 나를 못 믿어서 그래.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스 기다리기  (0) 2010.03.05
톡 까놓고 애기해서...  (0) 2010.03.05
[스크랩] 벌교에서 태백산맥을 넘다  (0) 2010.02.16
토말  (0) 2010.02.05
입춘  (0) 201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