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스크랩] 벌교에서 태백산맥을 넘다

설리숲 2010. 2. 16. 22:44

 

 이 세상 어디엔가 내 이름을 붙인 대상물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전엔 글을 쓰면서 바란 것은 내 글이 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일이었다.

 눈 초롱초롱한 미래의 영재들이 내 글을 읽고 분석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정말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세상으로부터 그 이름이 추앙받는 기분은 어떨까.

 여전히 사람은 죽어서 이름도 남기지 말고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은 어떨지가 새록새록 생각키는 것이다.

 

   

 

 벌교 하면 <태백산맥>의 고장이다.

 골목마다 조정래의 거룩한 이름이 붙어 있다.

 또 채동선의 거리도 있다.

 사람들은 늘 조정래를 생각할 테고 채동선을 떠올릴 것이다.

 

 생존인물에 대한 기념물은 맞지 않는다. 뭐든지 그의 사후에 평가하고 추모할 일이다.

 그간의 공적과 행적이 귀감이 되었더라도 이후 형편없는 행보와 언행으로 만인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위해 세운 모든 기념불을 다 부숴 버릴 텐가.

 삼척의 황영조 마을이라던가 예천의 김진호 체육관 등.

 그러나 어쨌든 당사자들은 자기 생애는 나름의 성공이라 자부할 수도 있겠다.

 조정래는 예전 <성공시대>라는 TV프로에 출연을 거부한 적이 있다.

 자신이 성공했다는 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의 기준이 있는가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우리 시대, 아니 한국문학사에 가장 위대한 글쟁이다.

 

 

  

 

 소설에서 현부자 집으로 나오는 집

 

 벌교에는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을 딴 상호가 많다.

 외서댁 낙안댁 소화 현부자 등등.

 태백산맥을 읽은 사람은 다른 소설들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유아들 글짓기 장난하는 것처럼 유치한 소설들이 아무리 진득하게 머리를 다잡고 읽으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을 꿈꾸는 지망생들이 조정래의 소설을 읽고는 그 꿈을 포기한다고 한다. 도저히 그 글에 필적하는 글을 쓸 자신이 없는 것이다.

 

 

 

     

 태백산맥 육필원고다.

 내 키를 넘어 대략 2미터 10센티 정도 되는 듯 하다. 원고지 16,500장이라 한다.

 고된 정신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다.

 저 많은 종이를 쓰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손과 팔의 혹사가 있었을까. 지레 질려서 소설 쓸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일니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 소설 <태백산맥> 중에서

 

 

 영화 <태백산맥>을 보고는 오정해에 빠졌었다.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기억이고.

 데뷔시절 오정해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쌍꺼플이 없는 고혹적인 눈이 그랬다. 하얀 소복 차림의 소화는 내 온 애정을 쏟기에 충분했다. 그녀를 본 충격은 오래 지속되어 한복 차림이 아니어도 늘 아름다운 자태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홍교(虹橋)다.

 이곳 사람들은 횡겟다리라 한다. 소화다리와 중도방죽과 함께 소설에 등장한다.

 옛날에는 배를 이어 만든 다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떼다리(筏橋, 벌교)라 불렀다. 벌교라는 이름이 된 다리이니 벌교의 상징적인 의미 있는 다리다. 초의 선사가 지금의 무지개 다리로 건설했다고 한다.

 

 

 연휴 내내 쨍하고 춥더니 오늘 아침에는 날이 많이 풀렸다.

 레깅스를 벗어 던지고 맨다리 미니스커트 아가씨들이 보인다.

 순천에선 인물 자랑 말고, 여수에선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선 주먹 자랑하지 말라더니.

 벌교 읍내엔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들이 많이 보인다. 늘 그런 건지 설이라 도시에서 명절 쇠러 온 아가씨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마 후자이지 싶다.

 어째든 벌교는 인물, 돈, 주먹을 모두 갖춘 곳이라는 느낌이다.

 요즘의 거리에는 키위와 고막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모든 해산물의 집산지다. 또 사통발달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자연히 돈이 넘쳤을 테고 돈맛을 안 주먹들이 판을 쳤을 것이다.

 다음에 오면 이곳 특산물인 고막을 배불리 먹겠다.

 

 아침에 우유를 사러 들어간 하나로마트에서 마침 채동선 노래가 흘러 나왔다.

 채동선의 고장이라서 그런지 아님 그 시각에만 마침가락으로 그 노래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하루종일 <그리워> 노래가 입에서 흥얼거려졌다.

 

 

 

            

              이은상 시 채동선 곡 그리워

 

출처 : 그 서늘한 숲에서
글쓴이 : 숲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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