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버스 기다리기

설리숲 2010. 3. 5. 22:34

 

 

 

 

가을이었다.

 시나브로 해는 짧아져 가고 걷잡을 수 없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다.

 진양호를 도보로 다 돌아보려면 하루로는 어림없다.

 햇덧에 수박 겉핥기로 가을의 호수를 보는 것도 어디냐.

 하긴 진주 시내서 댐까지 걸어오느라 아침나절을 다 써버렸으니 정작 호수 구경은 해전치기로 오후 나절을 고스란히 써야 할 판이었다.


 

 민가도 별로 없고 인적도 드문 곳이지만 차는 많아서 길가를 걷는 것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높고 투명한 가을하늘 아래 호수는 널따랗게 누워 있다. 애초에 가을 되면 이곳을 꼭 찾아오리라 마음먹고 진주 유등축제 기간에 맞추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미 가을의 절정을 넘긴 한적한 때였다.

 햇덧은 짧아 금새 해가 기운다. 호수에서 부는 바람은 이미 냉랭하다. 겉살이 푸르딩딩 차갑다. 시간이 짧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그 넓은 호수 한 바퀴를 다 돌아봐야 다 거기서 거기다. 어둡기 전에 어서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 지나쳐온 버스 승강장에서 얼핏 보기론 버스 운행횟수도 적고 그 배차 간격도 또한 길어 여차 하면 막차까지도 놓치기 십상이다. 시골에 여관이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버스를 못 타면 그야말로 낭패다.

 정류장이 하나 서 있다. 시간을 보니 대평에서 오는 남은 버스는 하나고 두 시간 이상 더 기다려야 한다. 몸은 얼어 오는데 거기서 그리 오래 기다릴 배짱이 없다. 걷는다.

 그렇다면 저쪽 완사에서 타는 게 낫지 않을까. 그쪽은 아무래도 버스가 더 많을 테니.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다.

 춥고 떨린다. 부지런히 걷는다.

 아주 오랜 세월을 여행길에서 보낸 나그네처럼 몸이 한껏 지쳐 있다.

 

 완사다. 상가도 있고 학교에 공공건물도 있는 제법 사람 사는 티가 난다. 춥다.

 정류장에 선다. 버스가 언제 올지 막막하다. 시골여행이 그게 젤 불편하다. 이놈의 버스가 몇 시 몇 분에 오는지 당최 모르니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행여나 한눈이라도 팔았다가 그 사이라도 휙 지나가 버리면 얼마나 성질나는 일인가.

 단체장이나 관련 위정자들에게 진심으로 부탁한다. 버스정류장에 최소한 버스 노선과 시간표를 게시해 줬으면 좋겠다. 잘 되어 있는 시군도 있지만 안 되어 있는 곳이 더 많다. 주민들이야 대략적인 시간을 아니까 모르지만 이방인들은 그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모른다.

 


 

 

 

 이걸 부르는 용어를 모르겠다. 머피의 법칙은 아니겠고.

 정류장에 아주머니들이 서넛에 아저씨가 한 사람 서 있다. 그래, 버스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간을 아니까 때맞춰 나와 기다리는 것이다. 안심이다.

 몸은 추워 오들오들 떨리는데도 목이 탄다. 길건너에 가게가 있다. 우유라도 하나 마셔야겠다. 설마 그 사이에 버스가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기가 막히다. 우유 한 곽을 사서 나오는데 버스가 부르릉 출발한다. 아니 저거... 아뿔싸. 놓쳤다 세상에나! 이렇게 기막히게 시간을 맞추다니. 정말 억울하고 분통터진다. 그놈의 우유 때문에. 이건 무슨 법칙이라 하나.

 다음 차를 타려면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춥다 정말 춥다. 어디 들어가 시간 때울 데도 없다. 그냥 추위와 맞서기로 한다. 춥다. 여고생인지 여중생인지 하나 옆에 와 선다. 그럼 버스 올 때가 됐나. 7시 5분에 온다고 소녀가 답해준다. 아직도 멀었다. 춥다 정말 춥다. 소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참 있다가 다시 온다. 아저씨 몇 시 됐어요? 몇 시라고 답을 해 주니 소녀 다시 사라진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나 몇 시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또 사라진다. 녀석은 어디서 시간을 때우는 걸까. 난 도저히 추워서 못 배기겠다. 시간은 왜 그리 안 가는지.

 소녀가 또 나타난다. 그녀가 묻기도 전에 내가 먼저 선수쳐서 시간을 말해 준다.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이렇게 해서 짜증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버스시간이 임박해 온다. 그놈의 우유 때문에. 세상에 그렇게 성질나는 버스기다리기는 난생 처음이다. 걸레 같은 시간이다. 내가 놓쳐 버린 버스를 저주한다. 빵꾸라도 나그라.

 그리고 버스가 왔다. 따듯한 온기. 천국에 든 듯한 기분이다. 소녀는 칠암동에서 내린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천국을 나가 도시 불빛 화려한 어둠 저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끝이다.

 


 

 

 정말 무서운, 등골이 오싹한 일이었다. 그날 모텔에서 나는 무서운 뉴스를 보았다. 시내버스가 사고를 냈다는. 가드레일을 받고 길 밖으로 밀려 나가 논바닥에 처박혔다고. 다행히 인명피해는 크지 않아 승객 한 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등줄기가 서늘했다. 내가 저주했던, 나를 한 시간 반이나 추위에 떨게 한, 그것 때문에 버스를 놓쳤다고 애먼 우유만 능욕하게 했던 그 버스.

 그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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