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겨울 이야기

설리숲 2006. 1. 20. 13:12

 

 그가 왔다.

 늘 자연을 동경해 온, 그러나 현실을 벗어나기 힘들어 했던 사나이.

 그가 모처럼 서울을 벗어나 정선 숲으로 왔다 겨울나그네처럼.

 새해를 사흘 앞둔 세밑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그가 서울을 떠난 구구절절 사연이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다만 그래도 후배라고 못난 촌놈 하나 기억하여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준 마음이 황송하리만치 고마웠지.

 크리스마스 때 집을 떠나 벌써 여러 곳을 유랑하여 찬 겨울바람 속을 걸어왔다는.

 

 좋다. 정선읍내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것도 좋고, 어둡기 전에 얼른 다녀오자고 재촉하여 숲속을 걸은 것도 참 좋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저 아래서 쉴새없이 올라오는 된 삭풍.

 몹시 추운 날이었다.

 

- 보십시오 형님. 이게 당신이 늘 안부를 묻던 그 나무들입니다

 

 그렇게 속으로 나의 창한 나무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참 좋다"

 그는 이말을 참 여러번 했다.

 글쎄 뭐가 좋은 걸까. 숲과 나무가 좋은 건지, 경치가 좋은 건지 매운 바람이 좋은 건지 서울을 떠나온 게 좋은 건지, 혹 내가 좋은 건가.

 아무튼 나도 참 좋다.

 

 밤늦도록 나눈,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이튿날은 정암사-

 정암사에는 그의 친우 되시는 덕진 스님이 계신다.

 스님과 이런저런 한담, 그리고 차향기.

 "참 좋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오솔길에서도 그는 이 말을 여러번 했다.

 그때는 내 가슴이 조금 아릿하기도 했다.

 그래요 좋군요 여지껏 좋은 것들을 진정 대해 보지 못한 사람, 그토록 풍성한 감성을 억누르느라 그리 힘들었나요. 저두 참 좋아요.

 

 정암사를 나와 고한읍,

 "이젠 영덕 쪽으로 가야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는데-

 난 참 멋대가리 없고 못난 놈이다. 읍내 어디 다방이라도 들어가 차 한잔 대접해 드릴 생각을 왜 못하냐 말이다!

 그렇게 그는 준령을 넘어 바다로 떠나갔다. 그날도 몹시 추웠다.

 

 그후로 그가 어디를 어떻게 표랑하고 다녔는지 가끔 실바람처럼 들려오긴 했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의 방랑은 자신이 시작한 거고 끝도 역시 스스로 맺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모두들 타인이다. 혼자 걸어가는 거다.

 그래서 길이란 인생이란 외롭고 서러운 거라고,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는 거라고.

 

 

 이른 새벽(아니라 밤이라고 해도 좋을) 산골짜기로 전화를 걸어와 한시간 이상을 주저리주저리 토해내던 그.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고 내 보기엔 그는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다.

 하데 뭐가 그리 공허한 걸까.

 변변치 못한 둘된 촌놈, 그것도 한참이나 나어린 놈에게 그 많은 신새벽을 하소연할 만큼 그를 외롭게 한 것은.

 

 다래덩굴에 연두빛 애순이 돋을 무렵의 어느 새벽에도 그가 전화를 했다.

 "아우야 초대야 홍림아-

 내가 너를 위해서 시를 지었거덩. 자 들어봐"

 그가 그 새벽에 전화선에 실어 들려준 두 편의 시,

 그 하나가 <정동진, 海松>.


 

   기차가 고개를 휘저으며 바닷물을 핥다가
   꼬리를 흔들며 멀어지는 곳
   포말이 이는 곳에 두어 사람 손을 내리고
   가지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
   해를 바랄 것인가 바람을 따를 것인가
   좌표 잃은 범선이 고래를 태운다
   줄서기는 힘이 들었다
   출렁이는 바다에 어둠이 오면
   빛나는 오징어 배 너머 바람이 운다
   산을 그리워하나 바다에 들려하나
   물에 잠긴 산기슭에 솔방울이 태몽을 꾼다
   기다림은 오래 되었다
   동 터오는 하늘에 구름이 일면
   선잠 자던 새 한 마리 가지를 흔든다

   기차는 남쪽으로 가고
   바람은 북쪽으로 가는데
   고래를 태운 범선이 서쪽으로 태백산을 넘어가면
   서울 시청 앞에 사람들의 물결이 인다
   광화문에서 정동으로 조금만 가면
   수평선이 일어나 마중 나오는 땅 끝
   가지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 

 

 

 

        




 

 형님!

 제 가슴 안에 지금껏 묵직하니 걸린 게 하나 있습니다.

 지난 여름 직지사에서 만났을 때 우정 저를 제천 시랑산방에 데려갈 요량이셨지요. 구차한 이유들을 들어 한사코 거절하고 말았지요.

 물론 저를 위한 세심한 배려임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실망하는 형의 눈빛을 그땐 왜 그리 냉정하게 외면했는지....

 

 크리스마스 날 서울의  주점 <마당>에서 임영태 선생을 뵌지라 조금은 짐이 덜어지긴 했지만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이 엷어지지가 않습니다.

 

 형님,

 다음엔 시랑산방에 저 좀 데려가 주십시오.

 소설쓰기는 진즉에 손놓았으니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반거들충이지만 거기서 따뜻한 찬 한잔 얻어 마시고 오지요.

 

 서울을 떠나셨다구요.

 시랑산방에 계시다구요.

 감히 축하한다고 말씀드려요(이거 돌 맞을지도 몰라)

 비로소 자연인이 되시는군요.

 바람 부는 낙엽숲을 같이 걸었던 세밑의 그날을 영원히 간직해 주시길 바래요.

 

 힘 내십시오. 형님이 농담처럼 원하시던 그 정기(精氣)를 멀리서나마 보내드릴 테요.

 "참 좋다"

 늘 이렇게 사시기를 아우 초대 기원합니다. 

 

 

  2005.5.17.  지리산에서 홍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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